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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시인 Nov 01. 2020

일상에서 만나는 아름다움과 기쁨. 20

그리운 가장동

   


       1

  시월 말의 보도 위의 낙엽처럼, 그렇게 우수수 시간의 잎새들이 저버렸다. 

  대전을 떠나온 지 벌써 수십 년, 그 사이에 여러 번 문학이나 학회 모임 등으로 들렀었지만 예전에 살던 가장동과 판암동은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다. 30대의 추억이 서려 있는 그곳은 그리움과 함께 고통 그리고 비애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 마음 한쪽에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월이 되자 아내는 “우리가 살던 곳을 가보고 싶다.”라고 했다.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여기고 가자고 한다. 이번의 생일은 사실 회갑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생일을 맞기 이틀 전인 일요일에, 첫째와 둘째 아들과 함께 넷이서 대전으로 출발했다.

  얼마 전에 허리를 삐끗해 운전이 불편한 탓에 첫째의 차에 탑승해 우리는 대전으로 향했다. 판암동을 떠나온 것은 내가 삼십 대 후반이었고, 큰아들이 일곱 살 둘째가 네 살 때였다. 육십 대 중반으로 접어들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진 나와 아내 그리고 삼십 대 초반의 두 아들과 동반하는 추억여행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길가의 나무들은 푸르름을 잃고 노랗게 또는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선선한 가을 기운이 스며드는 도로 위에서 나는 이십여 년 전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큰아이는 차 안에서, 갓난아이 시절 그를 잠재우기 위해 내가 들려준 노르웨이 출신의 그룹 아하(A-ha)의 노래를 틀었다. 경쾌하고 감미로운 리듬과 보컬… 어릴 때부터 모형 자동차만을 가지고 놀던 그의 장난감 같은 카브리올레를 타고 우리는 옛 기억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천안과 조치원을 지나 대전으로 접어드는 길, 오히려 현재가 과거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삼십여 년 전에는 꿈을 꾸어보지도 못한 일, 상상하지도 못한 사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큰 탈 없이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고, 가족 모두가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리라. 70년대 후반에 시작된 대전에서의 나의 삶은 대학과의 인연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조교 근무, 대학원 수학, 아내와의 신혼 시절, 강사 생활 등으로 이어져 있다.      

    

    2

  판암동 주공아파트는 내가 떠나올 때의 형상 그대로였다. 복도형의 15층 서민 아파트, 오랜만에 만나는 건물과 나무들까지 예전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우리가 살던 103동 4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아파트 단지를 한참을 조망하다가 내려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아파트 남쪽에 의연히 자리한 식장산과 아파트 옹벽 너머의 철길도 여전하다. 다만 산기슭을 따라 쭉 펼쳐져 있던 포도밭은 보이지 않는다.

복도형의  옛 살던 주공 아파트

  방 한 칸과 작은 거실이 있는 19평의 아파트에서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는 셋이 살았다. 박사과정을 마친 뒤 강사 생활을 하던 나는 그곳의 거실에서 시를 쓰고 논문을 작성했다. 밤이면 달이 뜨고, 어둠 속의 포도밭에도 달빛이 내려앉을 때면 소쩍새들이 꾹꾹 울어대고는 했다. 수시로 경적을 울리며 지나는 기차 소리, 봄이면 울어대는 뻐꾸기, 꿩의 울음과 식장산을 타고 내려오는 소슬한 바람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아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강의가 있는 주중에는 공주, 유성, 대전 동구에 소재한 대학에 강의를 다녔다. 대학 파출부란 그 당시의 별칭처럼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돌았다. 아침부터 시작된 강의가 때로는 야간까지 이어질 때는 입에서 단내가 돌았다. 자가용도 없이 시외버스와 시내버스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늘 지쳐 있었다. 

  늦은 저녁에 귀가할 때면, 아파트 앞의 포장마차가 그나마 유일한 위안의 장소였다. 아내와 나는 그곳에서 자그마한 돼지 족발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는 했다. 5년 동안의 강사 생활… 그동안 아내와 나는 늘 빈한하게 살았다. 아내에게 옷 한 벌 사주지 못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강의 시간을 줄인 뒤에는 우리는 더욱 쪼들렸다. 최소한의 생계비로 생활하던 즈음, 나는 현실과 괴리 속에서 번민하기도 했다. 차라리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생계의 현장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 속에서 고민하기도 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후, 논문을 쓰다가 아파트 복도에서 단지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나는 눈에 익은 정경과 마주쳤다. 서너 살 된 아이는 날개를 펄럭이는 나비 모양의 장난감 굴렁쇠를 굴리며 가고 만삭이 된 임부복 차림의 아내가 그 뒤를 따라서 걷고 있었다. 반 바지에 민소매 러닝셔츠 차림의 아이의 또 다른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가슴이 저리고 마음이 아팠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가장의 역할도 제대로 못 하면서 시인이 되고 박사가 되면 뭘 하나?” 하는 생각에 글을 쓸 수 없었다. 

  시간당 만 원도 되지 않는 쥐꼬리만 한 강사료, 교수들의 불합리한 처사와 온갖 궂은일도 감내해야만 하는 대학원 과정… 그 속에서 나는 ‘바닷가 근처의 작은 중고등학교의 국어 선생님’ 혹은 ‘학원 강사’를 늘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91년 시월에 아내는 둘째를 낳았다. 임신하고 나서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탓인지, 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감기를 한 달 동안 앓았고, 아내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병원에 다녀야 했다. 내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던 가족에 대한 아픈 연민과 한 장의 얼음처럼 차갑던 비애는 때로는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혐오 및 분노로 탈바꿈하기도 했지만 1991년 첫 시집 『말의 나라』에서 “상처로 가득한 가슴 언저리 / 아직 한 점 남아있을 것 같은 생살을 쥐어뜯으며 / 착하게 살아야지 사랑하며 살아야지 / 힘겹게 혼자 되뇌며 / 바람 센 날에도 말없이, 착하게 살아야지 / 살아가야지.”(拙詩 「산 숲 어둠. 10」)에서처럼 그런 감정들을 추스르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아내가 아이들과 산책하던 아파트 전면의 길

  아내와 이제는 장성한 두 아들은 아파트 앞의 작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십여 년 전,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저물 무렵 공기가 선선해지면 논문을 쓰던 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산책하던 길이었다. 큰 아들은 이곳은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어릴 적 기억을 이야기 한다. 아내는 그곳에 서자 참을 수 없었던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른으로 성장한 아들 둘이 아내를 꼭 껴안았다.         

   

     3

  아내와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가장동의 주공아파트가 헐리고 고층 아파트가 생겼다는 것은 십여 년 전에 그 곁을 지나며 알고 있었다. 도로와 주위의 몇몇 건물은 낯 설지 않지만, 예전의 아파트가 자리하던 곳은 새로 들어선 고층 아파트 건물 때문인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내가 말했다. “그래 여기야, 이 자리야!”      

가장동 주공 아파트가 있던 자리

  그곳에서 우리는 첫째를 얻었다. 맨 꼭대기이자 끝 동이었던 전셋집 508호에서 아이를 키웠다. 여름이면 햇볕에 달구어진 아파트는 사우나 방처럼 후끈한 열기로 더워져 열기가 식는 밤늦게까지 유모차를 끌고서 아파트 주변을 서성거려야 했고, 겨울이면 석유난로로 간신히 추위를 몰아내야 했다. 아이는 겨울이면 늘 할머니가 떠준 털 조끼를 입어야 했다. 

  아내는 두 아들과 손을 잡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마치 보물 찾기를 하듯, 과거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견고하게 서 있는 아파트 동 이곳저곳을 둘러보지만, 과거의 유물은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침이면 출근 버스를 타고 유성으로 떠나서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술에 취해 난간을 붙들고 간신히 오르던 젊은 아빠와 보채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몇 시간이나 단지를 돌던 초보 엄마가 살던 그곳… 장마철에는 곰팡이가 꽃무늬처럼 피어나던 방… 그래도 주말이면 삶은 돼지껍질을 맛있게 무쳐내던 포장마차가 있던 작은 시장에서 같이 장을 보고,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컴퓨터로 강의안을 작성하고, 아하의 ‘Take on me’ 음반을 턴테이블에 얹히던 그곳… 그곳은 이미 사라지고 아내와 나의 기억 속에서만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저녁이면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던 옛 길 터

  가을바람에 소슬히 지는 은행잎처럼 우리의 기억도 자꾸만 색감을 잃고 바래어 간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픔과 비애만은 아니었음은 왜일까? 빈한했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 소꿉놀이하듯 살았지만 되돌아보면 눈물겹게 아름다운 것은 또한 왜일까? 나는 가장동을 떠나며 30여 년 전에 썼던 시를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운 가장동    

 

가장동 십여 평짜리 주공 아파트 앞을 지나며

물질과 행복의 함수 관계를 생각한다.

아내와 첫 보금자리를 꾸미던 오 층 꼭대기 전셋집

길을 건너면 넝쿨장미의 평화로운 잠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시멘트 블록을 따라 한 모서리 돌면 나의 옛집이 보이고

지난 시절, 아내와 반찬거리를 사 들고 오르던 층계들도 보인다.

밤이면 창을 열고 낯선 대전 시내를 내려다보며

아이 키울 걱정을 하고,

곰팡이들이 벽지에 무늬를 새겨갈 동안 나는 심중의 말들을

하나둘 숨겨가고 있었지.

어디선가 날아온 비둘기 한 마리 메주콩을 찍어 먹으며

아파트 베란다에서 재잘거릴 때

만삭이 된 아내는 땀띠로 범벅이 된 몸으로 나의 조반을 지었다.

된장국을 마시고 다시 하루를 시작할 때

갓 핀 나뭇잎인 양 살랑거리며 흔들어주던 아이의 작은 손,

아버지와 남편을 흉내 내며 소꿉장난을 흉내 내며 살던 그곳

가로등의 푸른 눈들이 깨어날 무렵 아내의 품에 안긴

맑은 눈망울이 지친 아빠를 기다리는 곳.

가장동 곁을 지나며 아직 떠도는 지난날의 향기에

취해 돌아간다. 물질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기억을 안고

떠나간다. 나의 그리운 가장동.

                       -拙詩 「그리운 가장동」, 첫 시집 『말의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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