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예감
숲이 수상하다. 온통 초록이던 나뭇잎들이 하나, 둘 색감을 잃어가고 있다.
대학 주차장 뒤쪽에 일렬로 나열하고 있는 벚나무의 이파리들이 하나둘 황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태풍이 지나간 이후 선선해진 바람결, 나무 이편과 저편에서 콩새들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듯 짹짹거리고 먼 산에서는 꿩들이 뜸한 간격으로 소리를 지른다.
조금 지나면 숲에서 마치 원두커피 내음이 풍겨 나올 것 같다. 소란했던 한여름도 그렇게 지나고 있다. 한산해진 정원에서 새우난과 맥문동이 보랏빛 꽃대를 올리고 있는 동안에 갠 하늘에서 오랜만에 맑은 햇볕이 내리쬐고 구름은 저만 바쁜 듯 지나쳐 간다.
주중인 목요일임에도 대학 강의동은 전부 빈자리다. 교수 연구실도 기껏 한두 명만 온라인 수업을 준비하느라 출근했고 대다수 연구실의 안내 문패는 ‘퇴근’ 혹은 ‘외출’로 맞혀져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시행으로 강의뿐만 아니라 회의와 모임까지 없는 하루의 일정은 늘 ‘혼자 놀기’로 채워진다. 출근해서 복도에서 만난 동료 교수와의 묵례, 도서반납을 위해 들른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 학생과 건넨 사무적인 몇 마디의 말이 전부다.
다음 주에 시행할 강의 녹화, 혼자만의 도시락, 휴식 겸 책 읽기, 간헐적인 흡연 그것이 전부다. 스스로 선택이 아닌 타의에 의한 감금, 마치 쇠사슬에 발을 묶인 듯한, 새장에 갇힌 듯한 느낌 속에서 살아가는 날들… 그러나 2030년에는 지금의 시기를 그리워할 것이란 기상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한 기사가 나돌고, 그들의 이야기를 입증하듯 폭염과 혹한이 며칠 사이로 오간 미국 덴버의 기상이변이 미디어를 떠돌고 있다. 10년 후의 기상은 예측하기도 겁난다는 말을 떠올리면 그래도 잠시나마 따스한 햇볕과 풍성한 구름, 녹음으로 가득한 숲을 바라볼 수 있음을 행복이라고 말하는 억지라도 부려야 할 것 같다.
수도권에 내려진 ‘거리 두기 2.5 단계’의 시행으로 아홉 시면 일제히 문을 닫는 가게들… 내가 자주 들르던 카페도 9시 이전에 문을 닫는다. 오늘도 손님은 없고 나는 구석진 자리에서 혼자 글을 쓴다. 다소 쓸쓸하지만, 그런데 홀가분한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일상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작게는 가족, 친지, 동료로부터 사회의 일 구성원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벤치의 등나무처럼 서로가 질긴 인연이란 끈에 얽혀 떼려야 뗄 수 없는 양상 속에서 서로를 아끼고, 갈등하고, 화해하고, 격려하면서 함께 하는 것일 터이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나는 늘 그런 관계가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니 모임이 끊기고 서로 간의 연락도 소원해진 시간 속에서도 별 불편함은 느끼지 않으니 말이다.
노트북을 켜 들고 젊은 작가들의 글을 읽다가 문득 브런치에 올린 내 글을 개괄한다. 나의 글 속에서도 가을 냄새가 난다. 건조하고 밋밋한 문장들… 매끄럽고 끈적한 감정은 사라지고 객관적인 서술이나 묘사들이 위주인 글들… 높고 광활한 평원 같은 생각도 없고, 파도처럼 끊임없이 출렁이는 듯한 상상력도 결여된 드라이한 문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섬세한 감성과 돌발적인 상상이 사라진 것도 결국 계절, 나이 탓일까?
일요일 오후에 산으로 산책을 나선다. 선선한 바람에 긴소매의 운동복에 모자를 눌러쓰고, 슬링 백에 휴대전화와 수건을 챙겨 넣고 아파트 뒤편의 산길로 접어든다. 비봉산으로 접어드는 고가다리를 건너기 전에 인근 언덕에 있는 아내가 가꾸는 텃밭에 잠깐 들른다.
7월인가? 아내는 아파트 뒤편의 숲이 접해 있는 언덕에, 방 한 칸 정도의 텃밭을 가꾸었다. 장맛비가 자주 내리던 시기에 쪽파와 상추, 들깨를 심었고, 무씨를 뿌렸다. 그 뒤에 시장에서 산 배추 모종을 삼십여 포기 심었다. 나는 무성한 풀을 베어내고 개간을 할 때만 잠시 들렀다가 아내가 바쁠 때 물을 주기 위해 한 번 더 왔었다. 늘 모기를 많이 타는 편이고 농사 체질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 터라, 그저 곁눈질만 하는 편이었다. 그동안 아내가 솎아온 무 싹으로 열무 비빔밥을 해먹은 적은 있지만…
얼마 전, 아내가 말했다. “길옆의 배추 세 포기를 누가 뽑아갔어요!” “아직 잎이 손바닥만 한 어린 배추를 뭣 하러? 아직 크지도 않은 작물을 훔친 사람은 교양도 없고 참 불쌍한 인간이다.”라고 질타하자 아내가 말했다. “나는 이해가 돼요. 남들이 가꾸는 것을 보면 참 예쁘거든요!” 며칠 지난 후 “배추 잘 있나 밭에 안 가봐?” 그러자 아내가 “미사 때 기도했으니 괜찮을 거예요.”라고 답했다. “무와 배추 무사하라고 하는 기도도 있나?” 나는 속으로 웃었다.
며칠 전보다 채소들이 훨씬 달라져 있다. 어린 모종이었던 싹이 이제는 제법 배추 티가 난다. 30여 포기, 잘만 자란다면 올겨울 김장감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손님인지 파수꾼인지 고양이 한 마리가 밭에 앉아서 배추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혹, 아내의 기도에 예수님이 응답하신 것(?)은 아닐까. -하하!
소모임까지 금지하는 탓인지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비봉산을 오른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젊은 세대들도 보인다. 가족들의 모습도 보이고, 반려견과 같이 오르는 분들도 여럿 보인다. 땀에 젖은 주인과 헉헉대는 반려견을 보면 사람이 개를 끌고 가는 것인지, 개가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지난 폭풍우에 찢긴 가지, 폭우에 파인 샛길들… 여름의 흔적과 상처가 아직 완연하다. 나는 고갯길을 올라 소나무가 도열한 숲길을 걷는다. 오늘도 약수사의 정자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지난 봄날의 그 화려하던 모란도 여름날의 연꽃도 떠나고 맨드라미들만이 촛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래, 늘 같은 것 같지만 꽃도 나무도 우리도 늘 변하고 있고 떠나고 있다는 것을 약수사의 꽃과 나무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하산하는 오솔길에 밤톨 세 알이 떨어져 있다. 벌레 먹지 않고 반들반들한 그것들을 잠시 주워 든다. 며칠 전 이른 아침에 산에 다녀오던 주민 한 분이 “다람쥐와 청설모들이 밤이란 밤은 싹 쓸어가서 주울 것이 없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들은 벌써 겨울을 준비하는지도 모른다. 양 볼에 가득 밤과 도토리를 물어다가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곳에 묻고 있을 것이다. 오솔길을 내려오다가 물기가 있는 숲에 밤톨들을 던져주었다. 운이 따라준다면 그들은 겨울을 잘 견디고 싹을 틔울지 모른다.
한 시간 반 정도의 산책을 끝내고자 아파트 인근의 벤치에 앉아 신발 끈을 느슨하게 조정하고 스틱을 접는다. 벤치 앞에는 벌써 은행 열매들이 떨어져 있고 금잔화가 피어있다. 금잔화 꽃잎에는 테두리가 있음을 처음 알게 된다. 한참을 지켜보니 금잔화도 참 예쁜 꽃이다. 금잔화 너머에는 봉숭아들이 꽃잔치를 마무리하고 있다. 꽃이 진 자리에는 씨방이 달려있다. 한입 가득 씨앗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다. 언젠가 그것들은 폭탄처럼 터질 것이다. “그래 멀리, 멀리 씨앗을 뱉어내라! 그리고 내년에 다시 만나자.” 흘깃 서녘을 바라보니 노을이 진다. 푸르던 하늘이 붉게 물들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의 나뭇잎들도 붉게 물들 것이다. 쓸쓸한 가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