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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 Jul 24. 2020

아주 멋진 해장

내일이 없이 마시기엔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내일이 있을 확률이 높잖아요

삑- 알코올 분해가 다 되었습니다-


몸이 울리는 무언의 알람에 눈을 뜨면, 다시 잠에 들지 못할 걸 알면서도 괜히 침대에서 한참을 느적느적 뒹굴거린다.

몸은 네가 양심이 있으면 빨리 물을 마시라며 재촉하지만, 양심은 어제 술자리에서 이미 안주삼아 먹어버린 주인은 한참을 모른척한다. 그러다 더 이상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갈증이 심해지면, 그제야 흐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서 물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켠다. 그렇게 술 마신 다음날이 시작된다.



술자리는 끝났지만, 아직 그 즐거움은 한 발 남았다. 해장까지 야무지게 즐겨야 술자리를 백 프로 누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해장을 위해 다시 침대의 유혹에 넘어가기 전에 바로 아침 산책을 나갈 준비를 한다. 세수만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다음, 세상에서 제일 편한 추리닝에 슬리퍼를 신어주면 완성. 여기서 중요 포인트는 약간 꼬질꼬질해야 멋이라는 거다. 숙취가 전혀 없어도 어제 술 마신 티를 팍팍 내야 제맛이다.


그렇게 집을 나서 도착한 산책 장소는 한강도, 근처 공원도 아닌 바로 집 앞 이마트.

그게 무슨 산책이야-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자연 속을 거니는 것과 꽤 비슷한 구석이 많다. 산(에서 나는 것들)도, 물(에서 나는 것들)도 있지 않은가. 심지어 시원한 (에어컨) 바람까지 솔솔 불어오니, 여름 산책하기 최고지 뭐.


어차피 목표물은 하나지만, 괜히 마트를 빙빙 돌며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평일 낮의 마트는 한산하면서도 적당히 활기차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요즘은 뭐가 제철인지, 혹시 놓칠 수 없는 대박 할인 상품은 없는지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몸에 남아있던 술기운은 날아가 있고, 분명 살 계획이 없던 먹을거리 몇 가지가 손에 들려있다. 더 이상의 충동구매를 막기 위해 목표물로 향한다. 그건 바로 할인 들어간 토마토 한 팩. 너무 익어서 조금 무르고 빨리 해치워야 할 것 같은 녀석들이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이 한 팩을 비우는 데 2일이면 충분할 테니까.



집에 돌아오면 허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방금 집어온 토마토를 왕창 썰어 넣고, 올리브유, 레몬즙, 꿀 한 스푼, 얼음을 넣고 갈아내면 60년 전통 콩나물국밥보다 더 완벽한 해장템이 완성된다. 이제 책상 앞에 앉아서 토마토 주스를 홀짝홀짝 마시며 어제 즐거움을 구매하는 데 사용한 시간을 오늘은 어떻게 야무지게 써볼지 고민하면 된다. 이 해장 루틴까지가 내 음주의 즐거움이다.

시원하고 달콤하고 청량하고, 아주 완벽해!



 바쁜 날이라면 스타벅스의 자몽허니블랙티나 공차의 자몽그린티에이드로 하루를 여는 것도 괜찮지만, 이 멋진 해장은 정말이지 포기하기 어려운 즐거움이다. 그러니 술은 이왕이면 다음 날 일정이 없는 날에, 해장까지 즐길 수 있을 정도만 마시기. 술자리에서 “내일은 없어!”하고 마시다 안타깝게도 매번 아주 힘든 내일을 마주하곤 했던 알콜러버가 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적당한 거리를 두며 술을 사랑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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