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북8/100]Determined-3

11장-15장 자유의지 없는 세상의 공정함

4장까지 결정론의 논거를 쌓고, 5장부터 10장까지 반론을 하나씩 무너뜨린 사폴스키는 11장부터 본론으로 들어간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리고 왜 달라져야 하는가.

자유의지를 부정하면 인간은 타락하는가?

11장. Will We Run Amok?


사폴스키는 전작 'Behave 행동'을 발표한 이후 꽤 공격을 받았다. 대표적인 학자가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이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주장은 틀렸을 뿐 아니라 세상에 해롭다, 개탄스럽다고 대놓고 비난했다. 11장부터 15장은 그 비판에 대한 사폴스키의 정면 반박이다.


핵심 공격은 이것이다. "자유의지가 없다고 가르치면 사람들이 도덕을 버릴 것이다." 실제로 2008년 심리학 실험*에서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는 지문을 읽은 집단이 대조군보다 더 많은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결과가 나왔고, 이를 근거로 결정론적 세계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DNA 구조를 밝힌 프랜시스 크릭은 말년에 "당신의 기쁨, 슬픔, 기억, 야망은 사실 뉴런들의 거대한 집합체일 뿐이다"라는 환원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크릭의 주장을 활용한 실험이 있다. 2008년 캐슬린 보스(Kathleen Vohs)와 조나단 스쿨러(Jonathan Schooler)가 발표한 연구가 그 시작이었다. 실험군에게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거나 "자유의지는 환상이다"라는 지문(Crick의 주장)을 읽게 한 후에 이어서 다른 테스트를 보게 한다. 테스트에서 참가군들은 이 주장을 읽지 않은 대조군에 비해 더 많은 부정행위(Cheating)를 저질렀다. 이 실험을 근거로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정론적 주장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거나 우려한 학자들이 있다.


사폴스키는 2022년 대규모 메타 분석을 근거로 이 실험의 재현성이 낮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반론을 꺼낸다. "신이 없으면 인간은 타락할 것이다"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보다 도덕적으로 덜 행동하지 않는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도덕적 평판에 더 신경을 쓰기 때문에 더 도덕적으로 보이려 애쓸 뿐이다.

여기서 이미 사폴스키의 논리에 동의했다. 사폴스키는 이어서 왜 자유의지를 부정한다고 해서 덜 도덕적으로 변화하지 않는지 설명한다. 인간에게는 수백만 년간 진화해온 '사회적 직관(공감, 협력 본능)'이 뇌에 이미 깊게 각인되어 있다. 즉, 이론적 신념이 바뀌었다고 해서 타인을 돕거나 규칙을 지키려는 생물학적 기제(옥시토신, 전두엽의 사회적 규칙 준수 등)가 바로 꺼지지 않는다. 결국 결정론은 우리를 방종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더 냉철하고 실용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그럼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12장 Ancient Gears within Us: How does change Happen


사폴스키는 12장에서 바다 민달팽이(Sea Slug, 아플리시아)의 특정한 학습 행위를 수십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설명한다. 민달팽이의 수관(Siphon)을 건드리면 아가미를 수축하는데, 이 반응이 반복되거나 강화될 때 뉴런 사이의 시냅스 연결 강도가 물리적으로 변한다. 민달팽이는 '더 조심해야겠다'고 결심하지 않는다. 자극에 반응해 신경망이 저절로 재배선될 뿐이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자유의지가 없다고 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환경에 반응하며 변한다.


정치 선동가의 거짓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든, 좋은 책을 읽고 세계관이 달라지든, 그 변화는 바다 민달팽이의 시냅스 변화와 원리적으로 같다. 우리는 변화하려고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한다.


자유의지라는 환상이 만든 비극들

13장 we really have done this before


사폴스키는 '자유의지'라는 환상이 역사 속에서 어떤 비극을 낳았는지를 나열한다.

1. 간질(Epilepsy)과 마녀사냥: 발작은 그 사람의 타락한 의지나 영혼의 문제라고 믿어졌다. 그래서 그들을 고문하거나 화형에 처해졌다. 이제 우리는 간질이 뇌의 전기적 결함(생물학적 문제)임을 안다. 누구도 간질 환자를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2. 조현병과 '냉장고 어머니': 1950년대까지만 해도 조현병의 원인이 어머니의 차가운 양육 방식 때문이라는 '냉장고 어머니(Refrigerator Mother)' 이론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갑자기 인기를 끈 프로이드식 심리분석이 큰 영향을 끼쳤다.** 자녀가 정신병에 걸리면 어머니의 잘못된 양육 방식이 비난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이것이 신경전달물질과 유전의 문제임을 안다. 어머니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이 사라졌다.


** E. 풀러 토리 (E. Fuller Torrey)는 1992년 저서 《프로이드적 사기 (The Freudian Fraud: Frauds, Fancies, and Fallacies in Psychoanalysis)에서 조현병 등이 '부모의 양육' 때문이라는 프로이드식 해석이 얼마나 근거 없는 '사기'였는지 폭로했다.


3. 자폐증과 난독증: 글을 못 읽거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과거에는 '게으르다'거나 '의지가 부족하다'고 때리고 비난했다. 지금은 뇌의 정보 처리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특수 교육을 제공한다.


사폴스키는 우리가 '자유의지'라는 환상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생물학적 피해자인 사람들을 '악한 사람'이나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고 응징하며 쾌감을 느낀다고 비판한다. 이 논리의 정점으로 사폴스키는 'Buck v. Bell' 사건을 소환한다.


캐리 벅은 친척에게 성폭행당한 피해자였지만, 당시 사회는 그녀를 '도덕적으로 타락한 저능아'로 낙인찍었다.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간 이 사건에서 올리버 웬델 홈즈 판사는 공공의 복지를 위해 그녀의 생식권을 박탈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후 미국 전역에서 수만 명이 강제 불임 시술을 당했다.

사폴스키는 이 비극이 '도덕적 판단의 오만'에서 비롯되었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멈추게 된다. 과연 그럴까? 당시 판사들이 캐리 벅의 행동을 그녀의 책임이 아니라 유전자와 환경의 산물로 봤다면 판결이 달라졌을까. 오히려 그 논리라면 강제 불임을 더 강하게 밀어붙였을 것 같다. "그녀는 어차피 통제할 수 없는 유전자를 갖고 있으니 사회가 개입해야 한다"는 식으로. 자유의지의 부정이 반드시 관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의 통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간질환자에 대한 사폴스키의 주장을 좀 더 깊이 들어가보자. 차를 운전하다가 발작이 일어나서 사고를 내어 사람을 죽였다. 운전자는 이전에 발작이 일어난 적이 전혀 없었고 발작이 일어날거라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누구도 이 운전자를 보고 도덕적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사고는 불행하지만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간질병 약을 복용 중인 환자인데 그날 약을 먹지 않았다면? 실제로 이런 사건에서 원고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충분히 조심하지 않은 데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사폴스키는 이 경우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한다. 약을 먹지 않은 것도 그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동의할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논리는 일관되지만, 이 지점에서 뭔가가 걸린다.


처벌의 즐거움

14장. The Joy of Punishment


사폴스키는 인간이 응징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시간을 두고 5개의 사건을 예시로 든다.

1. 14세기 유럽은 기근과 전쟁으로 극도로 불안정했다. 이때 "나병환자들이 우물에 독을 타서 기독교인들을 죽이려 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다. 이 음모의 배후에 유대인과 이슬람 세력이 있다는 주장이 더해지면서 수천명의 나병환자와 유대인을 학살한 이후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2. 1757년.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이라는 사람의 칼에 찔린다. 다미앵은 왕의 몸에 작은 상처를 입혔을 뿐이지만, 당시 법에 따라 아주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끔직한 고문과 거열형을 당한다.


3. 미국 남부 캔터키주 1936년 백인 여성이 강간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하고 레이니 베대아(Rainey Bethea) 라는 흑인이체포된 후 사건을 자백한다. 그는 이 사건에서 '살해'에 대한 혐의로는 기소되지 않고 '강간'으로만 기소되는데 이유는 당시 켄터키주 법상 살인죄의 교수형은 교도소 담장 안에서 비공개로 집행해야 했지만, 강간죄는 해당 카운티에서 공개적으로 집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 2만 명의 군중이 축제 같은 분위기에서 흑인 청년의 교수형을 지켜봤다.


4. 테드 번디는 1970년대 중반 약 30여명의 여자를 살해한 연쇄살인마다. 1989년 1월 24일 그가 전기의자(Old Sparky)에서 처형될 때, 교도소 밖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Burn, Bundy, Burn!"을 외치며 환호하고 폭죽을 터뜨렸다.


5. 티모시 맥베이는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 폭파 사건의 주범이다. 168명(영유아 19명 포함)을 죽였다. 2001년 독극물 주입 방식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피해자 가족들을 위해 사형 장면이 폐쇄회로(CCTV)로 생중계되었고 처형장 밖에는 1,400여명의 기자가 몰렸다.


중세의 나병환자 학살부터 현대의 맥베이 처형까지, 수단은 '거열형'에서 '약물 주입'으로 덜 잔인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범죄자를 '사악한 의지의 소유자'로 보고 그에게 고통을 주며 환호하는 우리 뇌의 복수 기제는 변하지 않았다.


사폴스키는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찾아 응징을 하게 돼 있다고 말한다. "응징은 정의가 아니라 생물학적 쾌락이다"라는 것. 이러한 응징을 볼 때 강력한 도파민이 분비된다고 하는데 우리도 이미 경험으로 안다. <더글로리>의 성공을 보라.


이 보복 본능을 극복할 수 있을까? 사폴스키는 노르웨이의 할덴 교도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77명을 살해한 브레이비크에게 복수 대신 인도적 격리를 선택한 사회. 창살 없는 개인실, 총기 없는 교도관, 수감자와 함께 식사하는 시스템. 미국의 재범률이 60%를 넘는 반면 노르웨이는 20% 내외다. "복수하고 싶은 본능"보다 "어떻게 재범을 막을 것인가"를 선택한 결과다.


*** 세계에서 가장 인도적인 감옥으로 불리는 '할덴(Halden)' 감옥은 창살이 없고, 수감자들은 개인실에서 요리를 하거나 악기를 배운다. 교도관들은 총을 소지하지 않으며 수감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운동한다. 위험한 사람은 격리하되, 그 안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유지하며 다시 사회로 나갈 준비를 시킨다는 철학이다.

2011년 이 사법 시스템 최대의 위기가 브레이비크 테러 사건이다. 극우 테러리스트 안데르스 브레이비크가 77명을 살해하는 참극이 벌어졌으나 노르웨이 사회는 브레이비크를 기존의 시스템대로 대우하며 격리했다.



가난하게 죽는 것도 당신 탓이 아니다

15장. If You Die Poor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 탓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 탓이다."

사폴스키는 이 말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가난하게 죽는 것도 당신 탓이 아니라고.


렙틴 뮤테이션을 예로 들어보자.

렙틴은 지방 세포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뇌(시상하부)에 "배가 부르니 이제 그만 먹어라"라는 신호를 보낸다. 극히 드문 사례지만, 렙틴을 생성하는 유전자에 변이(Mutation)가 생긴 아이들이 있다.아이들은 엄청난 허기를 느끼며 끊임없이 먹게 되고, 병적인 비만에 이른다.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보며 "의지가 없다", "식탐이 많다", "부모가 절제를 안 시킨다"라고 비난해왔다.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가 아니라 '렙틴 주사' 한 방이다. 렙틴 뮤테이션은 극단적인 예시일 뿐이다. 우리 중 누구는 렙틴 수용체가 민감하고(절제가 쉬움), 누구는 선천적으로 둔감하다(절제가 힘듦). 우리 행동 중 어느 것도 우리 탓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성취를 자랑하는 것도 실패를 자책하는 것도 모두 달라진다. 사폴스키는 이것이 허무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사실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도 결국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폴스키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호소한다. 어떤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폭풍우가 온다고 하늘을 미워하거나 지진이 일어난다고 땅을 미워하는 것보다 더 서글픈 일이라고. 적어도 과학을 안다면 말이다.




11장부터 15장은 사폴스키가 왜 이 책을 썼는지를 보여주는 장들이다. 논리를 넘어 감정이 보인다. 데닛을 포함한 비판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반격, 역사의 피해자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호소. 설득력 있는 부분도 있고, 내가 동의하지 못한 지점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이 단순한 학술적 주장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설득되었는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자유의지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제한적이라는 것, 그리고 응징보다 이해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단 1나노미터도 없다는 사폴스키의 단언에는 아직 동의하지 못했다.


이 책과 다른 여러 책에서 사실로 인정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생물학적 원인들의 연쇄에 깊이 묶여 있다. 그리고 뇌는 자극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지금 뇌에 주는 자극을 바꾸면 미래의 뇌가 바뀌고, 행동도 바뀐다.


나의 가설은 여기서 시작한다. 뇌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는 순간이 있다. 투표 결과가 50 대 50인 그 찰나. 나는 그 순간에 우리의 의지가 아주 약하더라도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미세한 차이는 카오스 이론의 나비효과처럼 미래의 내 행동에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게 두 개의 길이 갈라진다.


지금 당장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결론은

: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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