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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Jan 27. 2023

19. 소고기와 관계에는 계산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당탕탕 무계획 제주여행(19) 아마 마지막이 될 집콕데이(230127)

눈을 뜨고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어머니께 전화 달라는 카톡이 와있었다. 우리 집은 워낙 무소식이 희소식인 집이어서 가끔 이런 카톡을 받으면 무척 놀라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별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께선 다음 달부터 수영을 시작하게 되셨는데 수영용품을 인터넷으로 주문해 달라는 연락이었다. 여유시간을 생각하면 쿠팡 배송이 빠를 것 같아 주문부터 해드렸다. 어떤 식으로든 운동을 다시 시작하셨다는 점이 너무 반가웠다. 잠깐이지만 수영을 배웠을 때 너무 즐거웠던 기억이 있어서 어머니도 수영에 재미를 붙이고 오래 즐기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받은 미션을 클리어하니 슬슬 배가 고파왔다. 그래서 밥이나 먹으며 일정을 시작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창문 블라인드를 올렸는데.. 세상에나. 눈이 펄펄 오고 있었다. 바람도 어찌나 심한지 나무들이 거의 꺾여나갈 기세였다. 어제는 그래도 꽤나 괜찮았는데 오늘은 날이 정말 좋지 않았다. 5분 동안 눈 오다가 멎더니 5분 동안 바람이 부는 날씨가 계속 반복되었다. 나가볼까 생각했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친구들도 내려오니까 이제 더 이상 집콕은 안 할 것 같으니 오늘은 집에서 쉬어보기로 했다.


어제 사놓았던 부챗살을 구웠다. 남은 콩나물국을 데웠고 얼려둔 밥은 전자레인지로 데웠다. 미역줄기볶음도 남겨놨는데 영 상태가 좋지 않아서 버렸다. 아주 조촐한 아침상이지만 숙소에서 소고기를 구운 적은 처음이라 은근 기대가 되었다.

역시 소고기는 미디움이지. 답 없는 사진상태와는 별개로 고기는 아주 맛있었다.


고기를 못 굽는 편은 아니다. 다만 고기 구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집에선 아버지가 구워 주시고 사회생활 이후 회식자리에서 고기를 구울라 치면 '손님이니 가만히 계셔달라', '막내가 고기 굽는 거 아니다'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들과 있을 때도 내가 워낙 요리에 젬병인 걸 아니까 집게와 가위를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그런데 최근에 종종 고기 구울 일이 생겼다. 작년부터 나는 먹방메이트이자 인생메이트인 계획요정님과 함께하고 있는데 요정님은 못하는 게 없는 능력자지만 본인이 인간이라는 증거를 고기 구울 때 보여준다. 요정님의 귀여운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순간이기에 흐뭇한 마음으로 집게와 가위를 들어 올린다. 열심히 고기를 굽다가 맛있게 먹고 있는 요정님을 문득 바라보면 그게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다. 내 입에 안 들어가도 배가 부른 기분이란 이런 걸까?


고기를 굽다 문득 요정님 생각이 났다. 그리고 어젯밤 통화에서 나누었던 말들을 다시 곱씹어보며 밥을 삼켰다. 요정님의 강점 중 하나는 내가 온갖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늘어뜨려놔도 그걸 잘 정리해서 나에게 다시 돌려준다는 점이다. 던지는 건 잘하지만 다시 주워 정리하는 데에 취약한 나에게는 배울 점이 되기도 한다. 어제도 그 강점을 여실히 느꼈던 시간이었다.


아무리 그게 요정님의 강점이라 해도 모두에게 그렇게 해주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거다.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 때문에, 내가 폭풍 속을 버텨야 할 때 요정님은 그 폭풍 속을 함께 들여다봐주고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 찾아봐줬을 거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내가 항상 생각하고 있던 관계의 단상이 다시금 떠올랐다.


관계에는 반드시 계산이 따른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산이 없는 관계는 '오히려' 오래갈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까운 관계일수록 계산 없이 베푸는 게 맞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그 입장에 대해 회의적이다. 우리는 예수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계산이나 조건 없는 관계가 지속되면 결국 지치기 마련이다. 지치는 관계라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상대에게 호의를 받았다면 내가 얼마나 큰 호의를 진정성 있게 받았는지 다시금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 역시도 상대에게 적어도 그만큼의 호의를 베풀고 어려울 때 힘이 돼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대가 없는 소고기는 없다. 호의는 돼지고기까지 만이다.' 돼지고기 정도의 호의라면 약간의 고마움 정도로 넘어갈 수 있겠으나 소고기에 상응하는 호의라면 말이 달라진다. 상대는 소고기를 주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지언정 적어도 받는 사람은 잊지 않고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꼭 그 이상으로 되돌려주는 게 맞다. 그 정도의 계산은 관계를 지속하는 데에 꼭 필요한 태도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나에게 호의로 베푼 소고기는 입에서 녹아내린다. 앞으로도 많이 베풀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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