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일홈 Aug 17. 2019

아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녀, 아빠의 딸인 것을 종종 잊고 살았던 것이다.

아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무더운 8월의 여름날이었다. 방 안에서 '어느 시원한 곳으로 폭염 대피를 할까' 고민 중이던 때, 아빠의 전화를 받았다. 아빠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무덤덤하셨다. 일가친척들은 위독하시던 할머니가 아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모두 놀랐다. 나는 그렇게 내 가족의 '첫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만 했다.


재작년부터 할머니께서 위독하셨고, 할아버지께서는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치매 증상을 보이셨다. 할머니께서는 일상생활이 힘겨우실 정도로 신체 기능이 저하되셨지만, 치매가 있으신 할아버지를 돌보셨다. 끝까지 가족들을 위하셨다고 해야 할지, 할아버지께서는 '미운 치매'는 아니셨다. 오히려 젊으실 적 못다 발산한 끼를 한풀이하시듯 풀어내셨다. 가족들 앞에서 장구를 치시며 노래를 하시고, 요양원에 다녀오시는 날이면 "내가 여기서 교장이다!"라고 자랑하시며 본인만의 세상에서 대장이 되시곤 하셨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이전 모습은 말없이 식사를 하시는 모습, 누워서 주무시는 모습이 전부였다. 그래서 처음엔 할아버지의 저런 모습에 민망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얼마나 본인의 삶에 한이 많으셨으면...' 하는 얕은 동정심을 드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던 것이다.


장례식장에서의 나는 얼떨떨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할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상을 치르는 일 또한 처음이었다. 그러다 염을 받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으로 인해 눈물이 쉬이 멈추지 않았다. 내 할아버지. 아빠의 아버지. 그리고 한 사람의 생의 마감. 심장이 뛰지 않는 육신.


할아버지께서는 할머니께서 골라주셨던 예쁜 수의를 입고 마치 웃으며 잠드신 것처럼 누워계셨다. 신발에 새겨진 꽃 두 송이가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그 꽃송이는 할머니의 사랑임이 틀림없었다. 염 막바지에 얼굴을 마저 싸고 덮으니, 비로소 할아버지의 육체가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때 내 가슴 한편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장녀인 고모는 "아버지"를 외치시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그렇게 할아버지께서는 육체를 벗어나 20cm 남짓의 작은 상자에 담기셨고, 땅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감히 헤아리기조차 힘든 89년의 세월을 오롯이 살아내시고 흙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할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그때 유난히 할아버지의 모습을 더 담고 싶었다. 셀카도 같이 찍고, 항상 남들보다 앞서서 뒷짐을 지고 걸으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정신을 똑바로 붙들어 매야한다고 계속 되뇌셨다. 아픈 할머니를 자꾸 보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렴풋이나마 할아버지의 마음,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는 수밖엔 없었다. 1930년대 시골에서 태어나 질곡의 세월을 보낸 내 핏줄의 삶을 헤아리기엔 나는 너무나 미숙한 존재였다.


할아버지 댁에 갈 때면 내 부모님께서 항상 말씀해주시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내가 어릴 때 밤에 잠에서 깨 계속 울어대니, 할아버지께서 자전거를 타시고 수십 리가 되는 읍내에 나가셔서 우유를 사 오셨다는 이야기. 또 돈벌이라고는 농사밖에 없으신 분들께서, 내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 쌈짓돈 백만 원을 내어주신 이야기. 그런데 나는 어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웃어 넘기기만 했을까. 내게 주신 사랑의 크기는 헤아리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정말 먹을 게 없어서 풀이라도 뜯어먹어야 하는 시절을 견뎌내 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시절 그 동네에서는 드물게 중학교까지 나오셨고, 일본어도 하실 정도로 학습 능력도 좋으셨다. 하지만 그 시절 시골에선 본인의 역량을 펼칠 기회는 없었다. 또 먹고사는 일이 바빠 공부는 사치라는 할머니께 혼나가면서도 장녀인 고모를 공부시키고자 하셨던 분이셨다. 그렇게 시골에서 악착같이 다섯 남매를 키우셨고, 그 다섯 남매는 현재 각자의 자리에서 건실하게 살고 있으며, 그렇기에 나를 비롯한 손자들 또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내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이었다. 나는 내 존재의 근원을 착각하고 있는 미숙한 존재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녀, 아빠의 딸인 것을 종종 잊고 살았던 것이다. 장남인 우리 아빠는 할아버지를 참 많이 닮았다. 얼굴이나 체형부터, 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성격, 출세에 대한 욕심, 그리고 자식에 대한 한없는 사랑. 내가 더 모르는 부분들까지,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장녀인 나는 그런 아빠를 많이 닮았음이 틀림없다.


나는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울음이 터진 아기처럼 혼자 방 안에서 엉엉 울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듣고 지하철에서 혼자 눈물을 삭이셨다.


무더운 여름날, 내 아빠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수영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