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 여행기 DAY3-2
점심을 먹는 곳으로 도착했다. 아직 날이 개지 않았는데, 젖은 채로 돌아다니려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그래도 뛰노는 어린아이들과 개들의 모습을 보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엉키며 노는 개들이 참 행복하겠다 싶었다. 식사는 필리핀식으로 차려진 뷔페에서 먹었다. 높은 수준의 음식은 아니었지만 나름 먹을만했다. 여기서도 게가 나왔는데, 껍질은 매우 딱딱하고 살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이 게를 먹겠다고 요리도 하고 또 수북이 쌓아놓고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나로선 신기할 따름이었다.
식사를 다 하고 해변을 거닐었다. 작은 배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데, 내 친구가 그 배가 고정된 줄 알고 기대었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소동이 발생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사람들이 힐끔힐끔하면서 속으로만 웃을 텐데, 필리핀 사람들은 대놓고 박장대소를 하더라. 그런데 그게 기분 나쁜 웃음이 아니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것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멀리서 바라봤던 해변가의 개들을 가까이서 보니, 피부병에 걸린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온몸이 벌겋게 올라와 연신 몸을 긁던 강아지. 그런 강아지와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뛰놀던 개들. 예뻐해 주는 사람의 손길이 조금이라도 닿으니 자신의 내장이라도 내놓을 것 마냥 배를 모래에 끌며 계속 쫓아오던 강아지들.
그러던 우리에게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남자 꼬마 아이가 다가왔다. 구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 짓는 법을 어디서 배워오기라도 한 듯,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우리를 바라봤고, 입꼬리도 한 껏 내려가 있었다. 내 친구는 마음이 약했고, 나도 그런 친구를 말릴 의지까지는 없었다. 우리에겐 푼 돈이지만 그 아이에겐 큰돈이겠지. 하지만 이 행위가 그 아이에게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기에 씁쓸했다. 내가 그 아이에게 그 순간 건넨 말은 "Study hard"였다. 그 아이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쫑쫑 달아났다. 내 딴에는 그 아이에게 도움될 말이라고 한 것인데, 그 이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는 나중에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그 아이들에게 공부가 사치인 걸까?',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데, 내가 상처를 준 건 아닐까?' 멀리서 바라봤을 땐 마냥 아름답던 해변가의 아이들과 개들. 가까이서 봤을 땐 생존 조차 쉬이 허락되지 않았던 모습을 보며 필리핀 여행이 점차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뱃머리는 호핑투어의 마지막 일정인 푸카 비치로 향했다. 푸카 비치로 향할수록 날이 거짓말처럼 개었고, 내리쬐는 태양빛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채도가 높아졌다. 하늘과 바다는 누가누가 더 푸른지 대결하는 것 같았고, 바닷가 모래는 눈이 부시도록 새하얬다. 나는 사람으로 꽉 찬 배가 답답해 선두부로 나와 배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같은 배여도, 배 내부와 바깥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보라카이의 하늘과 바다와 교감했고, 우리가 나아갈 곳을 정해주는 선원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난 푸른 불가사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니까. 현지인들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뱃머리의 가장 끝에 툭 하니 걸터앉아 묵묵히 일을 돕던 그 청년은 무슨 생각을 할까.
푸카 비치는 마치 천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호객꾼들만 없었다면, 이곳이 촬영 세트장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날씨가 좋은 푸카 비치는 단 하나의 칙칙함도 허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선명하고 눈이 부셨다. 거대 자본으로 물든 흔적도 없었다.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색소가 잔뜩 들어간 파란 음료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다. 내 눈앞엔 에메랄드 빛 바다와 새파란 하늘뿐이었다.
그 작은 해변가에도 음료를 파는 상인, 수공예품을 파는 상인들이 끊임없이 호객을 했다. 바닷가에서 음료 한 잔 하는 것은 그 누구나 기꺼이 즐겁게 할 터인데, 이 마저도 호객을 해야 할까 싶었다. 음료 가게 한편에 누군가 모래로 BORACAY OCT 22라는 글자를 만들어 놓은 걸 발견했다. 그 글자를 두고 관광객들이 해맑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현지인이 그들의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그는 다리가 불편해 보였는데, 자신이 매일 오늘의 날짜로 모양을 바꾸어 놓는다고 했다. 그의 직업을 뭐라 해야 할까. 모래 조각사? 사진사? 이런저런 포즈를 시키며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주는 처음엔 그에게 팁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결과물을 보니 별로 였다...)
아쉬운 마음을 안은 채 푸카 비치를 떠나기 위해 다시 배에 올랐다. 그런데 배 주변으로 어린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형들은 절벽에서 뛰어놀고, 더 어린아이들은 배 주변에 매달려서 낮게 달리는 속도의 배를 즐겼다. 그런데 아까 우리에게 구걸했던 남자아이가 다시 등장했다. 이번엔 다른 한국 여자들에게 접근했다. 그 아이가 구걸을 하자 그 여자분은 "미치겠다 정말..."라며 짜증 섞인 말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 뉘앙스가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는 모르겠다. 이미 마음에 인이 박혀 어떤 손님을 만나도 끄덕 않는 프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그러한 상황에 처해야만 한다는 것이 마음의 짐으로 다가온다. 날씨는 개어 천국 같은 날을 선사해줬지만, 보라카이를 알아갈수록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