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도둑의 일기"를 읽고
작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책.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는 제목의 책. 표지도 마치 공산주의 국가 뒷골목에서 찍은 것 같은 괴이한 느낌의 책. 이게 정말 작가의 일기인 건지 소설인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책. 나는 이 책을 안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여자들에게 상처 주기를 좋아했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이 책의 주인공은 여자에게 상처주기를 좋아하는 런던에 사는 알코올 중독자다. 책의 전반부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자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한 후로 여자들에게 상처 주는 일을 즐기게 되는 내용들이 이어진다. 그러다 미국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지루한 나날을 이어가다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이후는 스포이니 생략.
이 기이한 느낌의 책을 출판사 광고를 통해 처음 접했는데, 광고 문구가 "여성 혐오자"에 관한 내용이라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흠. 리뷰를 찾아보니, '이 책을 괜히 읽었다'라는 식의 리뷰나 '그래도 나에게 상처 준 남자들의 심리를 알게 되었다'라는 리뷰들이 있었다. 내가 느낀 바는 조금 달랐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나는 겉보기에 결코 술이나 마시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냥 실제로 그랬을 뿐이다.
주인공은 여자들에게 상처 주는 것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서도 전반적인 불만을 지니고 있다.
잠시 후, 나는 런던에 있는 내 동료 크리에이터에게 점차 환멸감을 느꼈는데,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분히 다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재능 있는 편이라고 믿었고, 그와 함께 작업하는 데에 진절머리가 났다. 우리는 벌써 사 년 동안이나 책상을 두고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봐 온 사이였고, 나는 이제 맞은편으로 몸을 날려 내 양손 엄지손가락들로 그의 후두 깊숙이 목을 꽉 졸라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는 데에도 한계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와 같이 직장 동료나 상사에 대한 반감은 우리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 보는 생각이 아닌가? 나는 슬슬 주인공에게 공감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실은 내가 인생에서 좋은 운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술을 마시던 시절에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짓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수치심과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술을 끊었을 때, 남을 상처 입히고 싶은 욕구 또한 줄어들었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려는 욕구로 대체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또 주인공은 위와 같이 자기 자신을 폄하하고 자책한다. (물론 잘난 척하는 부분도 많다) 가끔 내가 우울해질 때면 하게 되었던 자기 비하가 떠올랐다.
뉴욕에서는 그냥 모두가 상처 입은 사람들 같았고, 그게 오히려 더 정직하게 보였다. 아마 나는 그쪽에 더 공감했던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다리 아래로 콸콸 흘러가는, 이처럼 추악한 흙탕물의 범람을 어느 정도 다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위는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들이다.
어쩌면 어떤 법칙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적인 법칙. 마치 중력처럼. 우리의 감정적인 교류를 주관하는, 글로 써진 적이 없는 어떤 이치 말이다. 당신이 저지른 일은 그 두 배의 무게로 당신에게 다시 찾아온다. 아니, 세 배쯤 되는 무게로. 우리는 우리의 죗값을 치르는 벌을 받는 게 아니라, 그 죄악 자체가 우리의 형벌이 되는 것이다.
작가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내 후기는 이렇다. "우리 마음속의 악마적인 모습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해볼 수 있는 책". 나는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생각이나 감정에 공감하는 부분이 꽤나 많았다. 산소 마시는 것조차 아까운 인간쓰레기로 그려지는 이 주인공이 가진 생각과 감정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들이라 생각했다.
또 주인공은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주인공이(실물이든 허구의 인물이든) 궁극적으로는 이 책을 출판함으로써 자기반성의 결정체를 보여줬다고 해석한다. 나는 대학생 시절 학교 부설 심리 상담소에서 재학생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심리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상담을 통해 얻은 것 중 하나는 나 자신의 모습이나 상태를 이해하고 또 인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갖는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인정하고 난 이후에는 마음의 짐을 꽤나 덜어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꽤나 냉정한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나 자신은 물론 타인, 그리고 실체 없는 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불만, 증오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결국 "형벌"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형벌을 거부하거나 피해 갈 필요는 없다. 인정하고, 그 형벌을 잊지 않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된다. 오늘 밤도 침대 위에서 했던 말이나 행동들 때문에 이불킥하는 모두들에게.
*주인공이 했던 행동들을 옹호하는 글은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