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좋은 사이를 만들어보자
그렇게 하면 너무 가까운데...
칠판에 작은 교실 안의 책상들이 네모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아이들이 퍼즐 맞추기를 하듯 사람 모양의 그림을 이리저리 그려가며 옥신각신 했다. 점심시간의 식사 자리를 정해야 한다는 안건이 올라왔고, 꽤 진지하게 회의를 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서로 더 멀리 떨어져 앉을 수 있는지, 서로 마주 보지 않을 수 있는지를 놓고 말이다.
코로나 19는 학교에서 다루어오던 것들의 ‘방식’을 바꾸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내용’ 자체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모두 함께 하는 방법을 익히자고, 누군가가 소외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자고,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단순히 합이 아니라 곱이 된다는 것을 깨닫자고 꽤 오랜 시간을 공들여 이야기해왔건만, 요즘은 그와 반대되는 이야기도 많이 다루게 되었다. 가까이 있는 것이 서로에게 해가 되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학교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꽤 힘든 일인데 자진해서 ‘혼밥’ 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는 것을 보며, 씁쓸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서로가 너무 가까워서 힘들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는 것도 같다. 알고 보면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상처 받는 중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관계를 잘 들여다보면, 서로 가깝고 친하다고 여기는 관계에서 결국은 미묘한 신경전이나 싸움이 벌어져 마음이 상한다. 데면데면한 사이에서는 사실 싸울 일도 없다. 친구의 몸을 함부로 대하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허락 없이 사용하는 것도 가까운 사이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마음이 통한다는 믿음 때문에 무례해지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친구 사이에서 마음이 통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말에도 행동에도 거름망을 씌우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전해진 것들은 마스크 없이 직방으로 날아가는 비말처럼 서로에게 비수가 된다.
아이들이 생활에서 겪는 여러 가지 심리적 어려움들도 하나씩 짚어보면 결국 가장 가까운 부모님이나 가족들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다. 특히 가깝다 못해 자녀의 삶을 자신의 삶인 것처럼 동일시하는 부모님이 있는 경우,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마음고생하는 부모님의 노고와 별개로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삶을 세워나가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사소한 습관이나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 역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얻게 된다. 옆집 아주머니, 먼 친구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에게서 인생의 깊은 상처를 반복적으로 받을 확률은 극히 낮다. 서로가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내밀한 사이라고 여기는 관계에서 사실은 가장 큰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다.
늘 함께 해야만 하고 ‘같음’으로 관계를 확인하려 하면 건강하기 어렵다. 친구 사이이든, 부모 자식 관계이든, 동료 사이이든, 연인 사이이든...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 그 적절한 거리감을 인정하고 ‘사이’를 두는 것, 내 자리가 너의 자리와 떨어져 있는 것을 알고 그 간격을 침범하지 않는 배려를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툭 툭 떨어진 자리에서 혼밥을 하며 아이들이 저 쪽 친구에게 한 두 마디 건네본다. 마치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하던 영화 대사처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다. 게다가 조금 떨어져 앉았을 뿐인데도 소리의 전달 속도를 고려하듯 하나의 대사를 받으면 아주 잠깐 곱씹는 시간을 가진 뒤 응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새를 트자 타인을 더 선명하게 보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떨어져 앉은 시간들은 이다음에 함께 하는 자리의 기쁨을 알게 해 줄 것이라고,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소외된 자리의 마음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더 큰 힘이 만들어지는 즐거움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이번 참에 ‘좋은 사이’를 만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