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
몹시 끔찍한 꿈을 꾸었다.
연말이면 학생들이 한 해 공부 갈무리로 소논문을 쓰게 되어있는데, 한창 그 논문을 지도하던 시기였다. 내가 논문 지도를 맡고 있던 한 아이가 꿈속의 주인공이었다. 논문 쓰는 것이 너무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노하더니, 옆에 놓여있던 병을 깨서 자기 손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피가 철철 흐르는 끔찍한 장면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는데, 꿈속에서도 나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생각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얼른 병원에 가면 그 분리되어버린 손을 이어 붙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찰나, 아이가 반대편 손을 주먹으로 말아 쥐고는 있는 힘껏 내리쳐 그 떨어져 나온 손을 마구 짓이겨 버렸다.
사방에 피가 낭자한 그 장면에 공포인지,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격한 감정으로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내가 우는 그 소리에 놀라 겨우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이들의 논문 발표 날 아침이었다.
배우고 익혔다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확인하는 것일까. 시험 점수나 대학의 이름값으로 매겨지는 것들을 거부하면서 대안학교는 공부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세우고자 고민을 많이 한다. 점수나 시험이 없는 대신 아이들은 프로젝트 활동으로, 작품으로, 공연으로, 사업계획 등으로 자신의 공부 결과를 만들어 내보이곤 한다. 객관식 문제에 답을 찍어내는 것과 차원이 다른 다양한 모습의 결과는 가끔 감동을 준다. 그간의 배움을 갈무리해서 많은 이들 앞에 자기 실천을 공언하는 일은 꽤 멋져 보이고 사실 학창 시절의 나는 겪어보지 못한 것이라서 그런지 부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역시 어른들의 기대라는 것과 맞물리면 생각이 달라진다. 결과 중심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기 시작하면 형태만 다를 뿐 공부의 본질은 다시 허공에 붕 떠버리는 것이다. 어른들이 우리 아이가 번듯하게 자랐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동안, 정작 아이들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부담을 잔뜩 지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풀어놓은 문제집을 부모님이 채점할 때, 옆에 앉은 아이들의 기분을 생각해보면 비슷할 것 같다.
논문이며 뭐며 아무튼 하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제 손으로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운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모로 심란하게 하루를 시작하였다.
강민이의 논문 발표 순서가 되었다. 강민이는 무려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주제로 논문을 썼다. 교육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교육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란 어떤 기분일까 자못 궁금하다. 강민이는 ‘개별화’와 ‘사회화’ 두 가지 개념으로 교육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강민이의 논문 지도교사였다. 내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왔고 어떤 내용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질의응답 시간에 강민이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가 학교에서 하고 있는 것들은 교육의 본질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늘 궁금하다. 우리, 잘하고 있는 걸까?
“논문을 쓰는 시간 자체가 교육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쿠궁하고 가슴이 울렸다.
논문을 쓰는 동안 자기 생각과 능력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질문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개인의 고유한 특성이 드러나는 ‘개별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과 나누고 소통할 수 있게끔 하려고 여러 고민을 했는데, 그것이 ‘사회화’의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강민이와 함께 논문을 써나가는 과정은 사실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면담을 하고 나서도 강민이는 이런 글을 썼다가, 저런 글을 썼다가 하며 혼란 속에 빠져있었다. 질문을 던져주면 어떤 날은 이런 답을 하는데, 다른 날은 또 완전히 정반대의 답을 해서 황당할 때도 많았다. 면담 횟수가 늘어갈수록 주제의 개수도 동시에 늘어나는 희한한 경험이었다.
계속 물어야 했고, 또 그때마다 뱅뱅 도는 답들을 마주하며 막막함이 몰려왔다. 무덤덤한 표정의 강민이를 보며 오히려 발표를 걱정하고 학부모님들 앞에서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며 전전긍긍하던 것은 나였다. 하지만 교사인 내가 괴로워하는 동안, 정작 강민이는 화두를 들고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시간으로 생각하며 글을 쓰고 고쳐나갔던 것이다. ‘교육의 본질을 담고 있는 활동’을 하며 그 시간들을 거쳐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감동했다.
해마다 발표회를 준비하는 연말이면, 아이들은 걱정과 부담이 부모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눈물로 호소하며 드러내곤 한다. 다 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존재는 바로 부모님이다.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 무대 위에서 깡총거리는 춤을 추고 내려왔을 때, 껄껄 웃으며 '누가누가 잘하나' 이야기하던, 그 어른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와서 보게 되잖아요...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일이 즐겁고 행복할 때도 있고, 화가 복받칠 때도 있다. 그만큼 감동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그야말로 지지고 볶는 일상을 지내다 보면 평소에 잘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의 ‘평가자’가 암묵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절이 오면, 그 사실을 문득 깨닫고 괴로워하는 아이들이 뜬금없이 툭, 툭, 드러난다. 시험도 경쟁도 없는 학교에 선한 얼굴과 미소 짓는 표정의 엄한 평가자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 콧물 흘리는 아이를 마주하고 앉아서 나도 시즌 행사처럼 해마다 깨닫고 있다.
문장에 주어, 서술어도 없이 쓰던 아이가 다음 해에는 긴 소설을 써내기도 하고, 인터넷의 글을 짜깁기하던 아이가 진지하게 참고자료들을 찾아 근거를 대기도 한다. 한 해 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한 권의 책이 되기도 하고, 무대 위의 공연이 되기도 한다. 발표문에 코를 박고 읽어댔던 아이가 시간이 흘러 어느 날 관객을 바라보며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뭉클하다.
그렇게 되기까지 알게 모르게 아이들이 ‘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있다.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의 극심한 차이를 보게 될 수도 있다. 무대에서 실수를 해서 다 망쳤다가 다시 연습을 시작하기도 하고, 완성 직전이었던 피피티 파일을 발표 전날 날려먹고 처음부터 새로 만들기도 한다. 실패할 때의 그 좌절과, 그것을 딛고 다시 뛰어드는 용기를 한 장의 발표문으로는 담아내기도 어렵고 점수로 매길 수도 없다. 어른들은 가끔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공부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크게 말하고 싶다. 결과로 드러나는 것과 평가받는 것을 내내 신경 쓰다 보면, 본질이 무엇인지를 잊고 겉돌게 된다. 공부란, 무엇을 얻기 위해서,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으로 푹 젖어 물들어가는 것, 그렇게 얻어진 색으로 자신의 모습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연속된 과정이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가끔은 이를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곤 한다.
우왕좌왕 골머리 앓던 시간이 곧 공부였음을 말하는 강민이의 답변은 나에게 큰 가르침이 되었다. 그리고 큰 위안과 보상이 되었다.
꿈에서 본 것 같은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힘든 무언가를 잘라내고 싶은 마음은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는 붙이지 못하게 없애버리려면, 스스로를 깨뜨려야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