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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Feb 13. 2021

김장 매트 위에서 구구단 외우기

자신을 이겨내며 공부한 시간


저는요. 공부를 너무 안 했어요. 이제는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웬일로 성민이가 마치 철이 든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아주 가끔 그런 표정을 보이곤 했다). 한 해 마무리를 하는 맺음글의 주제를 정하느라 면담을 했는데, 어쩌다 공부 이야기가 나온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동안 공부를 ‘너어어무’ 안 했으니, 공부해보면서 그 과정을 남겨보겠다고 했다. 그 공부의 내용이란? 바로 구구단 암기였다. 성민이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성민이는 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여서 성민이를 어떻게 단속하는가에 수업의 성패가 달려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장난’이라고 표현되는 다종다양한 사고를 치곤 했다. 들끓는 감정을 주저 없이 표출하며 자주 누군가와 싸웠는데, 온 학교를 호령하며 분노를 쏟아내다가 상대방을 울리든지 아니면 자신이 울든지 하는 결론이 났다. 내 인생에 학생에게 쌍욕을 들은 적이 있으니 그 주인공 역시 성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잘 모르는 어떤 면이 있지 않나 싶을 때도 있었는데, 피아노를 전공한 선생님 옆에서 한번 흘깃 연주를 보고는 그대로 따라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천재가 아닐까 했지만, 그렇다고 음악 시간에 관심을 보이거나 집중하는 것도 아니었다. 거참.


그런 성민이가 제 입으로 공부를 해야겠다 말하고 있다! 구구단을 외워보겠단다! 절대 놓칠 수 없다!




다음 날부터 교무실의 내 옆자리는 성민이의 차지였다. 매일 방과 후에 구구단을 열댓 번씩 ‘읽었다’. 그동안 나도 꼼짝없이 앉아서 성민이가 2단부터 9단까지 한번 읽을 때마다 동그라미에 작대기를 그어갔다. 


구구단을 읽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지만, 앉아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횟수가 늘어갈수록 성민이는 몸을 배배 꼬아가며 좀이 쑤셔 못 견디겠다는 것을 한껏 드러냈다. 나는 틈틈이 그 몸을 바로잡아 주는 것도 해야 했다. 구구단을 읽고 난 뒤에는 간단한 소회를 적도록 했는데, 메모에는 ‘오늘 구구단을 몇 번 읽었다’는 것에 ‘ㅈㄴ 힘들다’라며 진한 욕설도 곁들였다.


구구단 읽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그 ‘빠짐없이’ 하는 것에 나는 집착을 했다. 그리고 그 절정의 날은 바로 ‘김장하는 날’이었다. 그날은 수업을 하지 않는 날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배추를 옮기고, 마늘과 무를 손질해, 배춧속 양념을 묻힌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놀이인 듯 학습인 듯 하하호호 친구들과 재미있게 김장을 하다가 점심으로 나오는 수육을 먹으며 행복한 날.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시간에 맞춰 성민이를 찾아갔다. 주변 아이들의 표정에서 ‘정인쌤 진짜 독하다’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 저항의 단말마를 내지르는 성민이가 눈빛으로 욕을 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 우리 둘은, 아직 고춧가루가 마저 닦이지 않은 김장 매트 위에 앉아 구구단을 읽었다. 부산스레 자리를 정리하는 주방 선생님들, 김칫독을 묻으러 이리저리 이동하는 아이들, 그 사이에서 울리는 성민이의 목소리. 이일은이, 이이는사, 이삼은육, 이사팔…


날짜가 지나가면서, 우리가 하는 건 구구단 암기가 아니라 ‘힘들지만, 꾸준히 하는 것’, ‘싫지만 이겨내고 하는 것’ 이 되었다. 그걸 배우는 것이구나 하고 점차 깨달았다. 구구단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야 특별할 것도 없는 방법이지만, 신기하게도 점차 암기가 되어갔고, 어느덧 성민이의 메모에는 ‘힘들지만, 끝까지 했다’, ‘처음보다 쉬워졌다’와 같은 글이 남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성민이가 조금씩 자기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기쁨을 옆에서 함께 느꼈다. 어느덧 구구단 암기가 아니라 ‘자신을 이겨내고 이뤄내는 것’으로 성민이의 맺음글 주제가 달라져 있었다. 애초에 자신의 현재 모습을 알고 인정했던 성민이는 이미 변화의 출발선에 선 것이었고, 느리지만 쉬지 않고 발을 놀리며 조금씩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있었다.


사실 공부란 무엇인가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만이 아니라,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삶의 태도 그 자체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 남는 것은 어떤 결과가 아니라, 나아가는 동안 마음을 쓰고 열정을 내뿜는 그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험 전날 밤늦도록 책을 뒤적이던 경험, 작품을 만들며 정신이 쏙 빠져 있던 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참는 순간 같은 것들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내리곤 한다. 구구단 암기와 상관없이, 들썩이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마지막 횟수를 채운 경험이 성민이에게 자신을 새롭게 보는 전환의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성민이는 구구단을 읽을 때마다 꾸준히 쓴 메모들을 모아서 맺음글에 담았다. 툴툴거리는 불만이 가득한 초반의 감상들과 이후 쭉 이어지는 성취감들이 함께 담겼다. 중학교 2학년씩이나 되어 구구단 암기하는 과정을 자랑스레 기록하여 남겼고, 그것이 연말에는 책자에 인쇄되어 영원히 박제되었다. 


그리고, 성민이 어머님이 맺음글을 읽고 많이 우셨다고 했다.




성민이는 나중에 동기들 졸업식에 나타나 너무나 점잖은 말투로 ‘음악 공부하고 있어요’하고 말했다. 김장 매트 위에서 구구단을 읊었던 성민이를 추억하다보니, 하나하나 그려가는 음표는 과연 어떤 곡으로 완성이 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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