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미군 부대 근처에 살았다. 엄마는 언니와 내가 영어를 자주 접했으면 해서 차를 몰고 미군 부대 내 도서관에 자주 데려가셨다. 부대 입구에는 시커멓고 긴 총을 어깨에 찬 군인들이 서서 출입자의 신분증을 확인했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우리는 군 가족이어서 일종의 미군부대 출입증이 있었고, 엄마로부터 그것을 확인한 병사는 들어가도 좋다는 말을 건넸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차창을 열었다. 차가 앞으로 가면서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얇은 머리카락을 넘기는 느낌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먼저 낯선 냄새가 코 뒤로 강하게 넘어왔다. 엄마, 무슨 냄새가 나. 내가 말하자 엄마가 답했다. 그러게. 외국 냄샌가봐. 그때까지 우리는 외국에 가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냄새가 낯선 곳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몰래 그 냄새를 버터 냄새라고 불렀다.
차창 밖에는 잘 정돈된 차도 너머로 잔디밭 위에 지어진 미군 관사들이 보였다. 집 외관은 전부 비슷한 흙 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보안을 위해 그런 것이라고 했다. 주거 지역 사이에는 드문드문 파파이스며 버거킹, 타코벨 같은 가게들이 보였는데 간판의 생김새가 한국 음식점과는 달라서 그것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푸른 잔디밭 위에 떠 있는 낯선 냄새와 색들을 넘어 엄마의 낡은 차를 타고 얼마간 달리면 어느새 도서관에 도착해있었다.
여덟 살. 영어 알파벳과 쉬운 영어 단어 몇 개만 알았던 내가 영어로 된 책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리 없었다. 대신에 나는 영어 동화책에 있는 그림을 보며 내용을 추측하거나 도서관 한편에 비치된 텔레비전에 비디오테이프를 넣어 영어 만화 영화 보기를 즐겼다. 그런데 하루는 옆 자리에 앉은 내 또래 남자아이가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빨간색 카라티를 입은 금발에 푸른 눈을 한 남자애였다. 그 애가 앞에 있는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영어로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내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몇 마디를 해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 애가 보려던 텔레비전이 고장이 났는지 영상이 나오지 않아서 내 텔레비전을 함께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내게 텔레비전을 같이 봐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나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날 나란히 앉아 함께 몇 편의 만화 영화를 봤고 이후에 그 애를 찾아온 그 애의 어머니에게 우리 엄마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의 이름은 리애나였고 나와 엄마에게 웃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남자애는 자기 이름을 조슈아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그 일을 계기로 친해졌다.
리애나는 그 후로 우리를 집에 초대했다. 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알고 보니 리애나는 미군 법무관인 남편이 한국으로 발령이 나게 되어 가족 전체가 한국으로 이사를 와 미군 부대에 살게 된 것이었다. 군 가족이라는 점, 그리고 자녀가 또래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리애나 가족과 우리 가족은 그 이후로도 많은 것들을 함께 하며 유대 관계를 맺었다. 쉬는 날에는 볼링장에서 가족끼리 볼링을 치기도 하고, 종종 서로의 집에 초대해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으며, 더 지나서는 부산으로 함께 여행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리애나가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우리를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다음 주 주말에 교회에서 부활절 행사가 있는데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은 종교가 없었지만 리애나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았기 때문에 그러겠다고 답했다.
행사 당일 아침에 엄마는 나에게 둥근 흰색 카라가 포인트로 있는 까만 원피스를 입히고 머리를 양갈래로 묶어주셨다. 그때 나는 부활절이 무엇을 뜻하는 지도 잘 몰랐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엄마 손을 잡고 교회에 도착했다. 리애나는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고, 미국인 교인들에게 우리를 소개했다. 모두들 우리를 웃으며 반겨주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그날 낯선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는 느낌은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사람의 온기라든지 나를 반기는 분위기 같은 것들은 몸으로 먼저 느끼고 기억되기 마련이니까.
우리 가족 소개가 끝난 뒤 목사님이 예배드릴 시간이라는 것을 알렸다. 사람들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다. 당연히 나는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경건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목사님이 뭐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다 같이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도 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엄마의 얼굴은 처음 봐서 낯설었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중에 기도의 내용을 궁금해하는 나에게 우리 가족의 평안을 빌었다고 말씀해주셨다. 한편, 나는 그때 기도할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눈을 감은 여러 사람들의 옆얼굴을 몰래 쳐다보았다. 창 밖으로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 아래 저마다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도가 끝나고 목사님의 말씀을 조금 더 듣다가 헌금을 내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가지고 있던 달러를 헌금함에 넣었다. 그런데 옆 자리에 앉은 교인이 은색 쟁반 하나를 건넸다. 그 위에는 작은 컵에 붉은 액체가 한 입에 마실 수 있을 만큼 들어있었고, 빵 조각들도 있었다. 엄마는 붉은 액체는 포도주인데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고, 빵은 예수님의 살이라고 하셨다. 비록 상징을 이해하지 못하던 때였지만, 나는 붉은 포도주를 받아 마시는 엄마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술이라서 엄마가 마시고 빵은 나누어 먹자. 말을 끝낸 엄마가 빵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을 나누어 주셨다. 빵에서는 밋밋한 맛이 났다. 그러나 나는 빵보다는 포도주를 마셔보고 싶었다. 은색 쟁반에 담긴 그 액체는 교회라는 공간 안에 있기 때문인지, 엄마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고, 내가 마시지 못하는 것이라서 과연 그 맛이 어떨지 궁금증을 더욱 유발했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가족 단위의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와 조슈아 또래의 어린아이들이 꽤 있었다. 어른들은 그런 우리를 위해 교회 앞 뜰 곳곳에 부활절 선물을 숨겨 놓았다. 우리는 나무 뒤나 풀숲 안에 숨겨진 달걀 혹은 동전 모양을 한 초콜릿을 신나게 찾아다녔다. 알록달록한 달걀 모양의 플라스틱 통을 열면 달러화가 들어있는 보물도 있었다. 우리는 다 함께 그 뜰에서 뛰어다니며 초콜릿과 장난감, 보물을 찾아내어 어른들에게 자랑하기 바빴다. 부드럽게 내리쬐는 따뜻한 햇살 밑에서 신이 난 채로 뛰어다닐 때마다 신발 밑으로 수그러지는 잔디의 느낌이 너무나도 좋았다.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우리는 집에서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늘어놓고 다 함께 나누어 먹었다. 처음 보는 음식에서는 처음 맡는 냄새가 났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와 맛 때문에 음식을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나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나중에 집에 가서 다시 한번 펼쳐 볼 초콜릿과 장난감 생각에 잔뜩 들떠있었다. 그런 것이 다 새로웠고 설레는 시절이었다. 밥을 다 먹은 우리는 다 같이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부 다 다르게 생긴 사람들 가운데 엄마의 두 손이 나의 작은 어깨에 얹힌 채로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우리는 그 뒤로도 함께 손을 잡고 몇 번 더 교회에 나갔다. 나는 그때마다 다 같이 기도하는 시간을 매번 기다렸다. 매주 같은 시간에 모두가 눈을 감고 누군가에게 감사를, 혹은 누군가의 평안을 비는 시간. 때로 무언가를 참회하는 시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묵계처럼 평온한 침묵이 찾아오는 시간. 그런 시간이면 창 밖으로 부는 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쓸리는 소리며 작은 새들이 힘차게 날아오르면서 우는 소리가 마치 손으로 잡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이 공기 중에 명징하게 울려 퍼지고는 했다.
그 후에는 미리 챙겨 온 달러를 헌금함에 넣고, 은쟁반에 얹힌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엄마를 보았다. 언제나 나를 포함한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렇게 했다. 엄마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기 때문에 그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역시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 행위와 그 시간의 공기로부터 어떤 정결한 경건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대신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그 뒤로 몇 번은 내가 달러를 헌금함에 넣겠다고 하거나 빵은 내가 다 먹고 술은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드리기도 했다.
교회에서 돌아오면 나는 조슈아네 집으로 놀러 가서 함께 만화 영화를 보거나 놀이터에서 뛰어놀고는 했다. 복잡한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어린이들이 주기적으로 함께 만나 노는 데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함께 놀면서 정해 놓은 규칙을 잘 지키는 것. 고마울 때 고맙다고 말하고, 미안할 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랬다. 같이 어울리며 놀다가 실수를 하지 않거나 아무리 작은 갈등 상황이라도 생기지 않을 수는 없어서 그럴 때마다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영어를 잘 몰랐던 나도 땡큐, 쏘리 정도는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짧은 말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었다. 물론 서로에 대한 애정과 함께 보낸 시간이, 또 비언어적인 눈빛과 몸짓으로 서로의 의사를 알아볼 수 있는 이해가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어른들의 세계에 비유와 상징이 있다면,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이 중요했다.
그런데 몇 번의 주말이 지나간 후에 엄마는 대뜸 한 가지 전할 소식이 있다며 운을 뗐다. 조슈아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놀라서 이유를 묻는 내게 조슈아의 아버지가 다시 미국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라고 찬찬히 설명해주셨다. 왜 어떤 작별은 준비할 시간조차 없이 다가오는 걸까. 그러나 나는 그때 이별이나 상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이후에 어떠한 감정을 느낄지 예측할 수조차 없었다. 말하자면 이별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될 만한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조슈아네가 한국을 떠나는 날, 나와 가족들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솔직히 말하면 작별 인사를 어떻게 했고 우리가 어떤 표정들을 지었는지, 무슨 말이 오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탄 자동차가 자꾸 앞으로 가면서 점점 멀어지던 모습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왔다가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러다 언덕을 넘어 그 점마저 사라지자 정말로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건 그 다음날부터는 더 이상 빨간 카라티를 입은 남자애와 영영 놀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사람과 이별하자, 그와 함께 보낼 수 있었던 미래의 시간이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몇 년이 지나 우리 가족도 그 동네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언니는 중학생이 되었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나는 그 이후로도 엄마와 함께 근처 도서관이나 대형 서점을 자주 찾으며 책을 즐겨 읽었다. 우리 가족은 딱히 여유를 부리며 살지는 못했지만 살면서 좋았던 추억을 가끔씩 같이 꺼내어 보고는 했다. 어쩌다 이야기가 나오면 먼 나라에서 살고 있을 조슈아네를 떠올렸다. 그때 그 일 기억나? 같이 미술관에 갔던 거. 또 부산에도 갔었잖아. 그때 정말 재미있었는데. 지금 잘 지내겠지? 하면서. 우리는 그럴 때마다 한 번씩 리애나에게 메일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메일 내용은 사춘기 소년이 된 조슈아가 음악에 빠져 뮤지션을 꿈꾸고 있다는 내용과 리애나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학교 락 밴드에 들어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전자 기타 연주에 심취한 조슈아의 사진을 보며 웃었고, 동시에 리애나의 건강을 걱정했다.
몇 년 뒤, 언니는 대학생이 되어 미국에서 인턴십을 할 기회가 생겨 떠났고, 그 과정이 끝난 후에 리애나를 만나러 그가 사는 동네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리애나와 그의 남편은 언니를 환대했고 자랑스러워했다고 들었다. 조슈아와 그의 형은 성인이 되어 독립한 후 각자 다른 지역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언니에게 마찬가지로 우리 가족의 근황을 물었고, 우리의 평안을 기원했다고 한다. 그게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들의 소식이다.
한편, 나는 그들과 이별한 뒤로 하루가 다르게 얼굴이 변하고 몸이 자라던 시절을 통과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의 이사를 경험하며 애정과 시간을 나눈 사람들과 뜻하지 않은 이별과 상실을 반복적으로 겪었다. 유년 시절이 지나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될 때까지 몇 번의 작별 인사를 했는지, 어쩔 때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살던 곳을 떠나와야 했는지 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조슈아 가족과 작별한 뒤로 교회에 몇 번 더 나갔지만,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교회에 가도 조슈아네를 만날 수가 없어서, 혹은 우리도 이후에 그 동네를 떠나게 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 내가 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는 사실도 까마득해질 무렵, 나는 성인이 되었고 대학에 붙은 후 입학을 축하하는 의미로 처음으로 포도주를 마셔 보았다. 맛이 독했고, 달콤했고, 썼고, 냄새가 강했다.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 냄새가, 맛본 것 같은 맛이 여러 가지 섞인 느낌이었지만 동시에 생경했다. 나는 결국 포도주 한 잔을 다 마시지도 못한 채로 잔을 내려놓았다.
대학에 가서는 국문학을 전공했다. 문학을 배우며 비유와 상징에 대해 더 깊은 공부를 했다. 무엇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마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 나는 몇 번의 연애를 했고 이별을 했으며, 한동안 연애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적당히 친하게 지내는 법도 익혔다. 어떤 관계는 진심을 내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종종 멀어짐은 자연스럽게 찾아왔고 그 과정에서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는 법도 스스로 깨우쳤다. 처음에는 모든 작별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나 혹은 상대방의 삶의 행로나 가치관이 변해 멀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 많은 경험을 해보며 새로운 취향도 생겼다. 알고 보니 나는 상큼하고 달달한 술을 좋아했고-도수를 낮춘 라임 모히또 같은-주량은 한 잔이었다. 그 이상 술을 마시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아 항상 음주를 절제했다.
시간이 더 흘러 내가 새로 알게 된 나의 모습에 익숙해지자, 많은 것을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어떤 만남도, 이별도, 경험도 크게 새로울 것이 없었고, 많은 것을 굳이 나서서 하려 하지 않았다. 바라던 바를 이룬 후의 미래를 지나치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살면서 뭔가를 성취하거나 꿈꾸던 일이 현실이 된다고 해서 그 후의 삶이 특별히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은 현대 소설 전공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문제가 없는 인물은 글을 쓰지도, 글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다.”
그 말을 듣고 울었다.
준비할 시간조차 없이 불쑥 찾아오는 작별 앞에서는, 그럴 때 느끼는 감정은 하나로 이름 붙일 수 없는 복합적인 것이라는 점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돌이켜 보니 그 후에 겪었던 수많은 만남이 지표가 되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떠난 것이다. 이제는 안다. 사람은 점이 되어 언덕 너머로 가버렸지만, 이렇게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고. 그런 것은 어떤 형태로든 남아 살면서 한 번씩 되뇌게 되지 않느냐고. 특별할 것만 같았던 나의 삶이 때로 보잘것 없이 느껴질 때, 누군가와 함께 한 추억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애틋해지지 않느냐고.
살면서 기도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마다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 것처럼 그 시간을 떠올렸다. 너와 내가 달라도 서로를 알아보고 환대하는 시간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들이 지나간 후에 약속처럼 고요가 찾아오는 시간을.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시간을. 매일 보는 사람의 낯설고 아름다운 옆얼굴을 관찰하는 시간을.
문득, 창 밖을 보니 어린 새들이 날아오른다. 둘셋이 짝을 지어 노는 모양이다. 그 소리는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이고 나는 혼자 앉아 이번에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