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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 Oct 20. 2022

목소리와 질문들

대학원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졸업 전시와 졸업 논문을 무사히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내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나는 디자인학과에 속해있었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은 그 해의 디자인 트렌드와는 결이 달랐다. 학부 때 국어국문학을 전공해 그전까지 미술 작업을 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던 나는 본격적으로 미대에 입학해 미술 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내가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같은 과 친구들은 대부분 그해 디자인 트렌드에 맞춘 졸업 전시를 준비했고, 그런 작업이 반응도 좋았다.

혼자서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나는 용기를 내 우선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의 모형부터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다녔던 미대에는 지하에 전문 실습실이 있어서, 학생들이 원하는 실습 방에 가서 목재, 금속, 도자기 등 자신이 원하는 재료를 다루는 기술을 배운 뒤 이를 활용하여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나는 하드보드지를 이용해 혼자서 작은 모형을 만든 뒤, 지하에 있는 우드 워크숍(Wood Workshop) 방에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워크숍 방 안에는 전문 테크니션과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아마도 테크니션들이 학생들에게 안전 교육을 하고 있는 참인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들고 있는 모형을 가리키며 이런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데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질문했다. 나를 흘긋 바라본 테크니션들은 지금은 예약이 다 찼으니 다음 시간에 먼저 예약을 하고 다시 오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그때, 그중의 한 테크니션이 내게 모형을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만든 모형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가 내게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해 줄 수 있느냐고 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로 내가 작품을 만들게 된 경위와 배경에 대해 말한 뒤 작품을 만드는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다. 내 작품이 나의 개인사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건드리는 지점이 있어서 그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배경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사오십대로 보이는 중국계 영국인이었다. 그는 내가 만든 모형을 다시 한번 살펴본 뒤 기술적으로 보완하면 좋을 점들에 대해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들을 꼼꼼히 받아 적었다. 그런 뒤 그가 말했다.

“다음번에는 보완할 점을 수정해서 들고 오면 좋겠어. 그러면 내가 그다음에 어떤 기술을 배워야 하는지 알려줄게.”

나는 나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준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이후에 혼자서 작업을 하면 할수록 불안함은 계속해서 커져 갔다. 자꾸만 나와 다른 친구들의 작업 간의 차이점이 두드러져 보였다. 과연 이대로 졸업 전시를 해도 될지 자신감이 점점 떨어져 갔다. 결국 나는 다음 워크숍 방문 때 나의 이러한 마음을 토로하고 말았다.

“수정할 점을 보완해서 가져왔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너무 불안해요. 다른 친구들 작품이랑 너무 달라서요.”

 그러자 그가 내 눈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다르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 줄 아니?”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껏 살면서 내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내 말을 잘 들어봐. 너는 네 목소리를 존중해야 해. 네 친구들의 목소리가 소중한 것처럼.”

“그렇지만 다들 트렌드를 따라서 작업하는데요…!”

그러자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이렇게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할게. 너는 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리고 네 목소리를 세상에 알려야 해.”

그가 나를 보며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해서 나는 그 말을 어떠한 의심도 없이 콱 믿어버리고 싶었다. 그냥 그 말이 사실인 것처럼.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내 안에 어떤 목소리가 꿈틀대고 있는지에 대해 찬찬히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살면서 그 목소리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도 돌이켜 보았다. 그는 타인을 존중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을, 그리고 때로 용기를 내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필요도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살면서 간절히 듣고 싶었던 어떤 말은 어째서 지구 반 바퀴를 지난 곳에서 낯선 타인을 통해 듣게 되는 것일까?

*

몇 주 뒤, 친언니가 런던으로 왔다. 나를 볼 겸, 런던 관광도 할 겸 회사에 휴가를 내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서 날아온 것이다. 언니는 런던에 있는 며칠 동안 나를 좋은 식당에 데려가 비싼 음식을 사 먹였다. 나는 그전까지 비싼 런던 물가와 한식을 좋아하는 내 입맛 때문에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서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해 먹었는데, 언니가 자신이 있는 동안만큼이라도 외식을 하자고 했다. 우리는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스페인, 멕시칸, 프랑스 음식 등을 먹으며 밀린 근황 이야기를 했다.

언니에게 또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뮤지컬을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어떤 공연을 관람할지 고민하다가, 뮤지컬 마틸다를 예매했다. 공연 당일, 우리는 코벤트가든 역에 위치한 케임브리지 극장으로 갔다. 극장 외관에 뮤지컬 마틸다의 포스터가 크게 걸려 있었다. 밝은 빛을 등지고 있는 소녀의 형체가 포스터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소녀는 양손을 당당하게 허리에 올리고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극장으로 들어가니 내부가 꽤 컸다. 우리는 2층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조금 일찍 도착해 극장 안의 좌석이 사람들로 점점 채워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관람객들의 연령대가 다양했다. 특히 내 눈을 잡아 끄는 것은 초록색 교복을 입고 뮤지컬을 보러 온 학생들이었다. 아마도 여자중학교 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온 것 같았다. 학생들은 재잘대며 잔뜩 들떠 있었다.


이윽고 막이 오르며 극이 시작되었다. 뮤지컬 마틸다의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마틸다는 한 가정에서 천재성을 지닌 소녀로 태어난다. 그러나 마틸다의 부모는 마틸다의 천재성을 알아주기는커녕, 물질주의에 찌들어 마틸다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지 않고 구박만 한다. 마틸다가 자라면서 학교에 가지만, 그곳에서도 폭력적이고 독선적인 교장 선생님을 만나 억압당한다. 그러나 마틸다는 이내 학교에서 자신을 알아봐 주고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 허니 선생님을 만난다. 마틸다와 학생들은 이윽고 용기를 내 학교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교장 선생님을 내쫓는다. 그리고 마틸다는 본래 가족이 아닌 허니 선생님과 함께 살기로 결정하며 막을 내린다.

  인물들이 부르는 노래  기억에 남는 노래가   있다. 학생들이 교장 선생님의 억압에 대항하며 부르는 노래 “Revolting Children” “우리는 반항아가  거야 / 우리는 반항의 시대에 살고 / 반항의 노래를 부르지라고 말한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교실 책상에 올라가 발을 구르는 안무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데,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다른 노래 “Naughty” 이렇게 말한다. “삶이 불공평하다는  알고 있다고 해서 그걸 참고 견뎌야만 하는  아냐 / 묵묵히 참고 견디고만 있으면 변하는  없어 / 그건 옳지 않아 / 옳지 않은 것은 바로 잡아야 하지 / 그러나  누구도  위해 바로 잡아주지 않아 /  이야기는 오직 나만 바꿀  있어 / 가끔씩은 약간 못되게  필요가 있어.” 나의 이야기의 결말에 순응하기보다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못되게  필요가 있다니. 그것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학교 을 배경으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나는 내가  나이   누구라도 나에게 저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보았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우리는 상기된 얼굴로 공연장을 나섰다. 언니가 극장을 나가기 전에 굿즈 샵에 들러보자고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구경하던 언니가 뭐 갖고 싶은 게 없느냐고 물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자신이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중에서 티셔츠 하나를 골랐다. 검은 바탕에 글자 하나하나 마다 전부 다른 색으로 쓰여 있는 옷이었다. 그 티셔츠에 적힌 글자는 다음과 같다. R-E-V-O-L-T-I-N-G. 극장에서 나온 언니와 나는 공연을 관람하기 전에 보았던 뮤지컬 마틸다의 포스터 아래에서 소녀와 똑같은 포즈를 하고서 한 장씩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자 왠지 공연을 보기 전보다 훨씬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코벤트 가든 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밤의 번화가에는 사람이 많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찬바람이 불던 시기, 날씨가 꽤 쌀쌀해서 겉옷을 여민 채 땅을 보고 빠르게 발을 옮겼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의 끝에는 방금 전에 나를 스쳐간 무리가 보였다. 아까 극장에서 마주친, 공연을 볼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여자 중학생들이었다. 초록색 교복을 입고 맞은편으로 걸어가는 소녀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며 목소리를 낸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

시간이 흘러 졸업 전시 날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우드 워크숍 방에서 작품을 완성했다. 뿌듯하게 작품을 바라보는 나를 보며, 줄곧 나를 도와주었던 테크니션은 내게 단 하나의 질문만을 남겼다.

“이 작품을 만들고 난 지금, 무엇을 느끼니?”

그는 나와 내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을 다 만들고 나서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물은 것이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바보처럼 얼버무리고 말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멋진 대사에는 멋진 대답으로 바로 응수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살면서 누군가를 만나 잊을 수 없는 말을 듣고 난 다음이면 그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까지 그런 질문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스스로에게 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교정을 나서며 그 말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 졸업 전시가 무사히 끝난 뒤, 나는 교정을 나서 런던에 있는 작은 집으로 돌아왔다. 떠들썩한 행사를 마치고 조금 멍해진 채로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선홍빛 노을이 맞은편 건물 뒤로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자 그 집에 이사 온 첫날 저녁에 창 너머로 보이는 노을 색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났다.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서양 회화 작품에서 많이 보았던 하늘색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수십, 수백 년 전에 그림을 그린 작가들도 보았던 것이다. 때가 되면 약속처럼 변하는 하늘의 색을.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물감을 개어 같은 색을 만들어 캔버스에 칠했을 것이다.

‘그래. 이 세상에 그냥 있는 이미지는 없어.’

나는 이제 그 말을 이해한다. 먼 곳까지 떠나와 내가 얻은 것은 대단한 성공도, 많은 이들의 주목도 아니었다. 이전과는 달리 나의 의지로 낯선 세상으로 떠나와 낯선 말들을 들으며, 어떤 목소리와 질문들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로 나는 삶의 어떤 과정을 통과하고 난 다음이면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너는 지금 무엇을 느끼느냐고. 어떤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고 있느냐고. 그럴 때면 마치 그 질문이 생생히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공간을 초월해 나의 삶을 관통하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들을 언제고 꺼내어 볼 수 있게 마음속에 소중히 보관해 두기로 결심했다. 그러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찬찬히 들여다본 후에, 내가 그래서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느냐고 자문할 것임을. 또, 언젠가 그런 말이 필요할 때면 가슴에 손을 얹고 기억을 되살릴 것이다.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내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이렇게나 흐뭇해진다고.

외국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나는 캄캄한 밤 비행기 안에서 별처럼 빛나는 육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우주 속을 유영하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작아지고 멀어지는 시간을 지나면 나는 이동하기를 멈추고 다시 현실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익숙한 냄새가 나고 친근한 언어가 들리는 곳으로. 포근한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감고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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