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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 Oct 24. 2021

일상 속에서 모험을 떠나는 방법 (하)

영국에 있을 때 테이트 모던에 자주 갔다. 테이트 모던은 런던에 있는 현대 미술관으로, 영국 정부가 발전소를 리모델링하여 그 일대가 관광 명소가 되어 언제 가도 관람객들이 많은 편이다.


어느 날은 테이트 모던에서 구인 공고가 난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졸업도 하지 않은 상태여서 내가 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밑져야 본전이라고, 학교 내 커리어 센터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첨삭을 받으러 갔다.      


나는 나를 상담해주던 선생님에게 걱정을 털어놨다. 나는 아직 졸업도 안 했고, 외국인이어서 아마 이 자리에 뽑히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한번 도전해보려고 한다. 그러자 선생님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테이트 모던에 가본 적이 있니? 네. 내가 대답했다. 거기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점이 뭐였니? 나는 잠시 생각해 본 뒤 말했다. 테이트 모던에 처음 갔을 때 건물 외관에 그네가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미술관 앞에 그네가 있어서 사람들이 그걸 자유롭게 타고 노는 게 신기했어요. 알고 보니까 그게 설치 미술 작품이더라고요. 저는 미술 작품은 함부로 만질 수도, 가지고 놀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제 편견이 깨졌어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그거 봐. 우리는 매일 보기 때문에 그런 걸 별로 새롭게 느끼지 않아. 자세히 보지도 않고 지나치지. 그는 잠시 후에 이어서 덧붙였다. 얼마 전에 뉴욕의 모마(MoMA)는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아티스트들의 작품 전시 준비를 하기 위해 아예 미술관 전체를 몇 주 동안 휴관했지. 테이트의 큐레이터들도 아프리카 등지로 새로운 그림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고 있어.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니? 이제는 새로운 흐름과 시선이 필요해. 너는 네가 외국인이어서 불리할 거라 생각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그렇기 때문에 다르게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한 때가 온 거야.            

    

그날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한 뒤 교정을 나섰다. 그러나 그가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과는 다르게 나의 예상대로 그 자리가 내 것이 되지는 않았다. 또, 미술계의 변화가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또 앞으로도 볼 일 없는 내가 그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을 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의 마음과 태도에 대해, 그리고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방식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어느 날은 "테이트 레이츠(Tate Lates)"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테이트 모던에서 평소에는 문을 닫는 저녁 시간에 개장해, 미술관 복도 한가운데에 디제이를 불러 음악을 틀고 간단히 술과 음식을 서서 먹고 마실 수 있는 파티를 연다는 것이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학교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곳으로 갔다.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시간이 조금 떠서 상설 전시를 보러 갔다. 그날 본 미술 작품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캔버스의 형태와 개념에 새로운 시도를 가한 작품들을 전시해 놓은 공간이었다. 보통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캔버스는 네모난 모양에 벽에 얌전히 걸려 있는 형태이지만, 그 공간에는 예술가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캔버스를 정의해 놓은 작품들이 있었다. 캔버스를 찢고, 가운데에 지퍼를 달고, 곡선으로 말아서 천장에 거는 등의 파격을 가한 것이다.      



Tate Lates



시간이 지나 파티가 시작되었다는 안내를 받고 나는 전시장에서 나와 미술관의 중앙부로 발걸음을 돌렸다. 도착하고 나서 보니, 중앙 복도에는 어느새 평소와 다르게 핫핑크색 조명이 켜져 있었고 디제이 한 명이 부스에 서서 반복적인 리듬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미술관 전체에 음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죄다 들뜬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며 연신 사진을 찍고 웃음을 터뜨렸다. 익숙했던 공간이 낯설게 변하자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디제이 앞에 서서 춤을 추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주변에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가, 함께 온 지인들과 다시 맥주를 마시며 각자 담소를 나누는 데 열중했다. 디제이가 연주를 하고, 비트가 흐르고, 그러면 그가 그 음에 맞춰 근육을 섬세하게 움직이며 아주 정성스럽게 춤을 췄다. 그의 춤에는 잘 추고 못 추고를 떠나서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그곳에 혼자 갔던 나는 멀리 서서 그 사람을 오래 쳐다보았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시선을 빼앗겨 보는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무신경함과 번잡스러움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아랑곳 않고 그 순간에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추는 사람. 두 팔과 다리를 움직여 마음을 다 해 공중에 그림을 그리고, 지워내고, 또다시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네 작품을 만든 아티스트는 사람들이 그네를 타면 몸이 떠서 자유로움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주변과 그 너머를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보고 표현할 것인가. 그날 그런 고민을 하며 미술관을 나왔다. 입구 앞에 있는 그네가 보여 올라타 발을 구르자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릴 때 이후로 몇 년 만에 타는 그네는 그때보다 더 무거워진 내 몸을 태우고 위로, 위로 향하다 진자처럼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나는 주변의 풍경이 흐릿하게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공중에 떠 간질거리는 몸의 감각에 집중하며, 현실 속에서 살아남는 일 그 너머에 대해 생각했다.



테이트 모던 앞 그네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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