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혼자 기숙사에 살게 되었다. 학교 근처에 군 자녀들을 위한 학사가 있어서 그곳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 아빠가 지방으로 발령이 나셔서 엄마는 아빠와 함께 지방에 있는 관사에, 대학생이었던 언니는 다른 기숙사에 살았다. 혼자 사는 것은 처음이라 내키지 않았지만, 언니와 나 모두 학교가 서울에 있어서 학업 때문에 부모님이 계신 지방으로 이사를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과 전부 다른 학교로 배정이 되어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했다. 걱정을 가득 안고 등교한 첫날, 나는 배정표에 적혀 있는 우리 반으로 올라갔다. 삼 월, 교실은 아직 냉기가 흘렀다. 비어 있는 자리 아무 데나 앉아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전부 모르는 얼굴이었다. 나는 조금 긴장한 채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존에 속해 있던 환경에서 떠나와 새로운 환경에서 공부나 일을 시작할 때면 언제나 겪게 되는 침묵과 어색함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하나 둘 자리가 메워지고 학생들이 거의 다 착석했을 무렵, 담임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한 다음 곧이어 대강당에서 개최될 입학식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일렀다. 입학식에 따로 준비를 할 것이 있나 싶던 찰나, 선생님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입학식 중간에 교장 선생님께서 각 반의 담임 선생님을 돌아가며 소개하실 때가 있을 거예요. 내가 호명되면 여러분은 환호성을 지르는 겁니다.”
말하자면 그건 신입 교사의 다른 반을 향한 기선제압에 가까웠다. 담임은 예행연습까지 철저하게 시켰다. 우리는 제 자리에 앉아 교실의 맨 앞에 서 있는 담임을 향해 환호성을 세 번 정도 질렀다. 몇몇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깔깔대는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에서 어떤 생경함을 느꼈다.
이윽고 교실 스피커를 통해 ‘곧 입학식이 시작되니 전교생은 대강당으로 내려 오라’는 안내가 들려왔고, 우리는 담임의 통솔 아래 발을 옮겼다. 대강당에 들어서니 모두가 똑같은 초록색 교복을 입고, 까만 머리를 하고 검정 구두를 신은 채로 줄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강단의 벽 가운데에는 큰 십자가가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 기다란 나무 의자가 끝없이 줄을 맞춰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 반에 배정된 자리에 조금 긴장한 채로 앉아서 입학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교장 선생님을 필두로 신입생들의 담임 선생님들이 줄 지어 강단 위로 등장했다. 교장 선생님은 십자가 아래 우뚝 솟아 있는 교단을 양손으로 짚은 뒤 훈화를 시작하셨다. 긴 시간이 흐른 뒤, 각 반의 담임 선생님을 소개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1반, 2반, … 한 분씩 소개가 끝날 때마다 강당에는 낮은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러다 마침내 우리 반 담임의 이름이 호명되었고, 반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를 제외한, 대강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놀란 눈치였다. 우리는 흡족하게 웃고 있는 담임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매주 수요일이 되면 전교생이 대강당으로 내려가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불러야 했다. 그 시간이 되면 모두가 입을 모아 같은 노래를 불렀다. 나는 종교가 없었지만, 합창 대회라도 열리는 학기가 되면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찬송가와 CCM에 맞춘 안무를 구상한 뒤 이를 연습해서 공연을 해야 했다. 일 학년 때는 “우리 학교 만만세”라는 가사로 끝나는 교가와 이탈리아 가곡을 외워 음악 시간에 가창 시험을 보기도 했다. 곡 선정 기준이 의아했지만, 고전 이탈리아 가곡을 고등학교 때 하나라도 외워 놓으면 졸업하고 나서도 어떻게든 도움이 될 거라는 게 음악 선생님의 주장이었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수행 평가 점수에 들어갈 거다. “라는 선생님의 마지막 한 마디에 교실은 이내 이탈리아 노래를 서툴게 연습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까로미오 벤~ 크레디미 알멘~”으로 시작되는 그 가곡은 “사랑스러운 연인”에 대해 노래하는 곡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Caro mio ben, credimi almen 오 내 사랑, 오 내 기쁨
senza di te languisce il cor, 이내 말씀 믿어주시오
Caro mio ben, senza di te languisce il cor, 귀한 그 몸 이별할 때 참 쓸쓸하다오
Il tuo fedel so spira ognor. 한숨짓는 참된 나를
Cessa crudel, tanto rigor네 너무 멸시 말아라
Cessa crudel, tanto rigor, tanto rigor 한숨짓는 참된 나를 멸시 마라
Caro mio ben credimi almen, 오 내 사랑, 오 내 기쁨
senza di te languisce il cor, 이내 말씀 믿어 주게
Caro mio ben, credimi almen, senza di te langui il cor 귀한 그 몸 이별할 때 참 쓸쓸해 참 쓸쓸해
나는 사랑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가사의 뜻이나 노래의 아름다움을 떠올려보기보다는, 얼른 노래를 외워서 수행 평가를 무사히 치러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가창 시험 날, 나는 우리 학교를 찬양하는 노래와 사랑스러운 연인에 대한 곡을 차례로 불렀다. 그러나 여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단독으로 불러야 했기 때문에 긴장한 탓일까. 여러 번 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부르다 가사를 더듬고 말았다. 결국 나는 가창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학원으로 향했다. 좁은 학원 복도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종이 치면 교실로 들어가 여러 학교 학생들과 섞여서 수업을 들었다. 서로 잘 모르는 몇십 명의 학생들이 가득 찬 공간에는 특유의 기운이 흘렀다. 물론 고등부 반 분위기가 가벼울 리 없었다. 학원 선생님이 수업 시간 중간에 회심의 농담이라도 한 마디 하면 그제야 웃음소리가 흘렀다. 학생들은 종종 학원 교실을 “닭장”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불이라도 한번 나면 복도가 사람들로 막혀서 아무도 탈출하지 못할 거야. “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그렇게 잘 가르친대.”라는 소문이 난 학원이나 강사의 정보를 입수하면 그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갔다. 새로운 학원의 우수반에 들어가려면 테스트를 보거나 전국 모의고사 등급을 밝혀야 했다. 어떤 학원은 전국 석차가 뛰어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그 내용을 학원 건물 밖에 플래카드로 걸어 놓기도 했다. 매달 학원에서 치르는 자체 모의고사가 끝나면 학원 게시판에 전체 등수가 적힌 긴 종이가 붙었다. 그런 날이면 아이들은 그 앞에 우르르 모여 자신의 등수를 확인했다. 끊임없이 숫자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학원이 끝난 뒤 근처 번화가를 지나치는 날이면 주위를 돌아보며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상상했다. 멋져 보이는 레스토랑 옆을 지나가며 ‘언젠가는 저런 널찍한 곳에서 어른이 되어 식사를 하겠지, 와인이나 샴페인도 한 잔씩 기울이면서.’와 같은 상상을 했다. 그때 내 옆에 있을 사람은 누구일까 기대해보기도 했다. 또, 찬란한 불빛이 켜져 있는 쇼윈도 뒤의 말끔한 여성 정장을 바라보며 ‘과연 저런 옷을 입게 될 미래가 오기는 할까.’ 하는 의문과 기대를 동시에 가지기도 했다.
삼 학년이 되자 학교에는 부쩍 방황하는 아이들의 수가 늘어갔다. 대입을 앞둔 시기,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고 희망에 차 있는 학생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가올 미래를 쉽게 가늠하지 못했다. 평소에는 그러지 않던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손을 들고 선생님에게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고 질문하거나, 쉬는 시간마다 크지도 않은 운동장을 괜히 여러 바퀴 빙빙 도는 건 불안의 다른 표현 방법이기도 했다. 학원에 가지 않는 날에는 야간 자율 학습을 신청해 학교에서 자습을 했다. 친구들과 함께 석식을 먹은 뒤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며 이야기를 하다가 종이 치면 자습실로 들어가 공부를 했다. 한참을 집중하다가 무심코 창 밖을 보면 어느새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 학교 뒤에는 낮은 산이 하나 있었다. 공부를 하다가 지겨우면 가끔씩 고개를 돌려 캄캄한 산 풍경이나 그 위에 말없이 떠 있는 둥근달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했다. 어둠 속에서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은은한 달빛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적막이 좋았다.
자습 시간이 끝나면 가방을 싸서 교정을 나섰다. 갈래길에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뒤 마을버스를 탔다. 그 시기에 가장 위로가 되던 것은 라디오와 음악이었다. 나는 버스 좌석에 앉아 교복 주머니에서 까만색 아이리버 엠피쓰리를 꺼내 좋아하는 라디오 채널을 틀거나 음악을 들으며 하루의 정서를 혼자서 다듬었다. 공부에 집중할 때는 학업 루틴을 유지하기 위해 그게 어떤 감정이든 깊게 빠지는 것을 경계했지만,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그동안 애써 묻어두었던, 내면에 잠겨 있던 정서를 혼자서라도 꺼내어 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에 다양한 라디오 채널을 들으며 한국 인디밴드와 외국 밴드 노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좋은 노래가 나오면 재빨리 녹음 버튼을 누른 뒤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나이 때 새로운 음악 장르를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는 것은 마치 새로운 세계를 경탄 속에 유영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마을버스가 출발할 때부터 몇 정거장을 굽이굽이 돌아 버스에서 내린 뒤 학사에 있는 작은 방에 문을 따고 들어갈 때까지 나만의 세계를 유영했다. 그때만큼은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나의 세계를.
공부가 도저히 하기 싫은 날이면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책이나 시집을 빌려 읽었다. 교과서에 실린 국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즐거웠지만, 그 작품을 지문으로 만들어 정답을 찾아내는 공부에는 질려 있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는 주로 외국 작품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지나치게 교훈을 주려고 하거나 비장한 작품은 피했다. 나는 소소한 일상에서 사건이 전개되는, 내가 잘 모르는 배경을 하고 있는 소설을 주로 읽었다. 그럴 때면 소설 속 인물과 함께 내가 모르는 세계를 천천히 걸어 들어가 보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저 작품 속 분위기나 느낌을 음미하는 것을 즐겼다. 책 속 어떤 구절에도 쉽게 의미를 규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작품을 여러 겹으로 읽어내는 것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은 학교에서 두발 검사를 했다. 수능이 몇 달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학생주임 선생님이 각 반을 돌며 자를 들고 학생들의 머리를 쟀다. 나는 삼 학년이 된 후로 머리를 자르지 않아서 머리 길이가 어깨를 웃돌았다. 선생님은 내 머리가 길다며 며칠 내로 머리를 자르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뒤로 계속해서 머리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 있는 내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날 그러고 나서 지하철을 타고 한강으로 갔다. 자전거 대여소에서 한 시간에 삼천 원을 내고 학생증을 맡긴 뒤 가장 마음에 드는 자전거를 빌려 페달을 밟았다. 나는 사람이 많은 잔디밭을 지나 더 멀리로 갔다. 음악이나 말소리가 멀어지고 풍경이 깨끗해지면 그제야 귀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더 생생하게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내가 일상을 벗어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물리적으로 확인했다.
한참을 앞을 보며 달리다가 힘이 들면 옆으로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그제야 멈춰 서서 바라볼 수 있었다. 말없이 흐르는 강물이 천천히 물결을 여러 겹 만들며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꾸자꾸 넘어가는 것을 관찰했다.
멀리서 보면 비슷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다 달라.
혼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옆을 보니 강가의 버드나무는 바람의 속도와 리듬에 맞추어 길게 늘어뜨린 제 몸을 우아하게 흔들고 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은 그 움직임을 보느라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기를 한참, 강 너머로 노을이 지며 하늘색이 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다시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내려갈 때 신나게 달렸던 내리막길은 되돌아갈 때 한껏 벅찬 오르막길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갈까. 이렇게 수많은 길 중에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택지는 왜 이렇게 적은 것만 같을까. 미래의 삶은 정말 양분되어 있는 걸까. 주변 어른들은 ‘대학에 가면’으로 시작되는 가정법을 자주 사용했고 그 외의 미래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우리가 들은 “안전한 세상”의 여집합에 대해 묻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었다.
학사로 돌아와 교복을 벗어 걸어 두고 몸을 씻었다. 샤워가 끝난 뒤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엄마였다. 엄마는 내 안부를 물은 뒤 잔소리를 시작했다. 방이 건조할 테니 수건 적셔서 걸어 놓아라, 먹는 밥이 부실해서 어쩌니 등등 매번 듣는 말에 건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침대에 누우니 작은 천장이 꽉 차 보였다. 나는 “대학에 가면…”으로 시작되는 문장을 떠올려 보았다. ‘대학에 가면… 노랫말처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까.‘, ‘대학에 가면… 가슴에 사무치는 작별도 하게 될까.’ 나는 몸을 뒤척이며 내가 모르는 감정과 미래를 상상했다. 이 세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 가면 내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그러다 이내 그러기를 그만두었다. 그 시절에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내가 모르는 사랑이나 그럴듯하게 보장된 미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감고 낮에 보았던 버드나무를 떠올렸다. 유연한 나뭇가지는 춤을 추듯 정성스럽게 바람을 조각했다. 아름다운 선의 움직임이 여러 겹의 면을 만들었다.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나는 그 동네를 떠났다. 그건 내 미성년 시절과의 작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