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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 Oct 20. 2022

다롱이 이야기


여서 일곱 살 때쯤 개를 한 마리 키웠다. 오렌지 빛의 털을 가진 포메라니안이었는데, 이름은 다롱이였다.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다롱이는 원래 그때 내가 살던 동네 빵집에서 키우던 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롱이는 매일 빵집 앞에 묶여 엎드린 자세로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유치원이 끝나 엄마 손을 잡고 함께 시장에 갔다가 내가 반갑게 인사하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를 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때 키가 작았기 때문에, 무릎과 허리를 많이 굽히지 않아도 몸집이 작은 개에게 쉽게 눈을 맞추고 털을 가만히 쓰다듬어볼 수가 있었다. 빵집 주인아저씨는 장사하느라 매번 바빠 보였고, 내가 (빵도 잘 안 사면서) 매일같이 개를 보러 오고 또 예뻐하자 어느 날은 데리고 가서 당신 대신 키워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반려 동물을 들인다는 것이 어떤 책임감과 태도를 요하는지 아직 가늠해볼 턱이 없었던 어린 나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며 우리가 개를 데려가 키우자고 졸랐다.


다롱이는 매일 묶여있다가 마당이 딸린 전원주택에 살게 되자 눈에 띄게 표정과 행동이 달라졌다. 푸릇한 잔디가 깔려 있는 부드러운 땅을 작은 네 발로 총총거리며 뛰어다녔고, 열심히 풀 사이를 헤치다 벌레를 발견하여 펄쩍 놀라기도 했으며, 큰 콩만 한 코를 연신 씰룩이며 신중하게 흙냄새를 맡기도 했다. 새로운 거처와 우리 가족에게 어느 정도 적응이 끝난 뒤에는 스스럼없이 함께 어울려 놀았다. 가을이 되어 내가 잠자리를 잡겠다고 잠자리 채를 붙잡고 뛰어다니면 덩달아 신나서 내 뒤를 쫓아다니며 마당을 활보했다. 뒤를 돌아보면 다롱이는 큰 입을 활짝 열고 혀를 내밀면서 씩씩거리는 호흡을 하며 웃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면 묘하게 안심이 되었는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웃고 있는 작은 생명체가 (아마도) 의심의 여지없이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흡이 턱끝까지 차 올라 흥분 상태에 있다가 뛰기를 멈추고 조금 지나면 비로소 힘이 든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데, 그때 누군가가 옆에 있어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다롱이와 나는 그 표정을 서로 확인하며 놀았다. 나는 그때 동물에게도 영혼과 감정이 담긴 표정과 눈빛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과 교감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몇 번의 계절을 함께 보내며 다롱이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비가 오거나 예초를 하는 날이면 다롱이를 실내에 들인 뒤 언니와 함께 장에 나가 사온 강아지용 샴푸로 몸을 씻겼다. 다롱이는 순했고 우리를 잘 따랐다. 목욕을 하는 데도 말썽을 피우거나 크게 저항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작은 개는 능숙하지도 않은 우리 둘의 손길을 받아내면서 목욕 시간 내내 얌전히 있었다. 목욕이 끝나면 햇볕에 잘 말린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 뒤 따뜻한 바람으로 털을 말렸다. 소파에 앉아 품에 안고 잘 말린 오렌지빛 털에 얼굴을 묻으면 개한테서 나는 고소한 체취와 은은한 샴푸 냄새가 섞여서 났다. 목욕을 하고 나서도 다롱이에게서 나는 냄새가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좋았다. 노을이 지면서 노오란 햇빛 조각이 우리 집 창문을 타고 넘어오면 그게 마루 바닥을 천천히 더듬으며 움직이는 모습을 아무 말 없이 함께 관찰했다. 고요 속에 노란빛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그것을 따라 움직이던 뒤통수와 작은 귀를 아직까지 기억한다.



다롱이는 어느 날 임신을 했다. 아무래도 뒷산을 타고 우리 집 마당까지 내려와 가끔씩 놀고 가던 흰색 떠돌이 개가 뱃속에 있는 새끼들의 아빠인 것 같았다. 다롱이는 눈에 띄게 배가 불러왔고 젖이 커졌다. 우리 가족은 그전까지 개를 길러본 적이 없어서 개의 출산에 대한 지식도 전무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다. 다롱이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엄마는 영양식을 해서 먹이셨고, 우리는 다롱이를 더욱 조심해서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 전체가 지방으로 내려가야 할 일이 생겼다. 하루 이틀 다녀올 일정이었지만, 엄마는 왜인지 느낌이 이상하다며 집에 있는 작은 방 하나를 다롱이 방으로 꾸며주셨다. 푹신하고 안락한 쿠션 위에 담요를 깔고 먹을 것도 곳곳에 두셨다. 우리는 그러면서도 그 사이에 설마 무슨 일이 있겠나 싶은 마음으로 떠났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날, 우리는 깜짝 놀랐다. 다롱이 방에 들어가니 다롱이 밑으로 꼬물거리는 새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집을 비운 사이 그 방에서 혼자 몸을 푼 것이다. 나는 새끼들을 보고 흥분했다. 눈도 못 뜬 어린것들은 어른 손바닥보다 작았다. 다롱이는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어린 새끼들을 연신 핥아주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다롱이를 보고 여간 기특해하지 않았다. 겁이 났을 텐데 어떻게 혼자서 그 많은 새끼를 다 낳고 돌보고 있었냐는 것이다. 엄마는 그 길로 고기를 사서는 고깃국을 푹 끓여 내오셨다. 다롱이는 그 국을 잘 받아먹고 기운을 조금씩 차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나보다도 작은 생명체가 더 작은 생명을 창조해냈다는 사실이 놀랍고 대견했다. 또,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면서도 우리들 손길을 한 번도 피하지 않는 다롱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한 마리가 움직이지를 않네.”


 움직이지를 않는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새끼들을 관찰하던 아빠가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숨을 쉬는지 확인해봐야겠어. 아빠는 그 한 마리를 조심해서 빼내 온 뒤 생사를 확인하셨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다. 엄마가 다시 한번 잘 확인해보라고 걱정스레 말씀하셨다. 그러나 결과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묻어줘야겠군.”


아빠는 다롱이가 밥을 먹는 사이에 죽은 새끼를 몰래 데리고 나가셨다. 새끼를 묻어주러 가는 길에는 나도 동행했다. 이름도 없는 그 어린 새끼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아파트 화단 안쪽의 깊숙한 곳을 찾아 화분을 옮기는 데 쓰던 작은 모종삽으로 땅을 팠다. 그러고는 나에게서 죽은 새끼의 몸을 건네받아 그 안에 묻었다.


 “잘 가라.”


아빠가 말했다. 나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작은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죽어서 이름도 못 붙여주고 정도 주지 못했다. 늦은 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미미하게 나던 꽃 냄새가 흙내음과 섞여서 공중에 떠돌았다. 너는 이름도 없이 떠났구나. 너에게 미처 정도 주지 못해서 눈물조차 나지 않는구나. 그 사실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다롱이가 자기 방에서 연신 빙글빙글 돌며 낑낑대고 있었다. 죽은 새끼를 찾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다롱이가 처음 내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계속해서 바닥을 발로 헤치고 냄새를 맡는 다롱이를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새끼를 잃은 어미의 심정이 오죽할까. 얼마나 애가 탈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셨다. 저것이 지 새끼가 없어진 것을 알아채고 저런다면서 혀를 찼다.  


죽은 새끼를 찾아 울부짖고 낑낑대기를 며칠, 다롱이는 울음을 멈추고 남은 새끼들에게 젖을 먹였다. 새끼들은 배가 고팠는지 열심히 젖을 받아먹고 살을 찌웠다. 밥을 먹고 나면 똥을 쌌는데, 몸집이 작아서인지 똥도 애벌레만큼 작았다. 우리는 면봉을 조금 적셔서 새끼들의 엉덩이를 닦아주었다. 그러고 나면 금세 저희들끼리 모여 잠을 잤다. 몇 주가 지나자 새끼들은 눈을 떴다. 쌀알만 한 까만 눈이 어미를 혹은 우리를 찾아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그 눈 안에 온 우주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새끼들은 눈을 뜨자 금세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다리가 다 자라지 않아 마룻바닥에서 제대로 기어 다니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그럴 때는 바닥에 수건을 깔아주면 그 위에서 열심히 다리를 뻗어 기어 다니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잘한다, 잘한다 하고 응원을 했다. 시간이 더 흐르자 새끼들은 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또랑또랑해진 것이 제법 강아지 태가 나기 시작했다. 어미나 형제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고, 사료를 먹어 똥도 굵어졌다. 볕이 나는 날이면 다롱이와 강아지들은 마룻바닥 한편에 옹기종기 모여 햇빛을 쬐며 낮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날, 다롱이가 죽었다. 그전까지 건강하게 지내는 줄로만 알았는데, 다롱이는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한 순간에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이해되지 않는 죽음 앞에서 통곡했다. 너는 왜 떠났을까. 혹시 먼저 간 새끼를 따라간 것일까. 왜 이별은 준비할 틈도 없이 찾아오는 것일까.

새끼들은 더 정을 붙이기 전에 마당이 있는 넓은 집으로 입양을 보냈다.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온 터라 좁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다섯 마리의 강아지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함께 자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셨다. 물론 나는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몇 날 며칠을 울어댔다. 현실적으로 모두가 한 공간에 함께 지낼 수 없다는 문제는 어린 내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새끼들을 보낸 뒤 우리 가족은 그 뒤로 한 번도 반려 동물을 들이지 않았다.



다롱이와 새끼들을 보낸 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길을 걷다가 우연히 어린 동물들이 제 어미와 살을 맞대고 있는 것을 보면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때만큼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너무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듯이. 그들을 보고 있는 시간은 마치 현실과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영원 같은 순간 같다. 나는 그럴 때면 다롱이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너는 나를 처음 보았을 때 이미 알았을까. 우리가 함께 할 시간과 운명을. 매일 빵집 앞에 묶여 있다가도 나를 발견하면 두 다리를 들어 웃으며 반겨주었던 너를 쓰다듬었을 때의 행복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함께 뛰놀던 유년의 시간을, 네가 우리에게 와주어서 행복했던 시간과 추억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도착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전부터 달려오던 너의 발자국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너는 그렇게 나를 기다렸겠지. 문을 따고 들어가 한참을 반기며 놀다가 너를  다리에 가만히 눕혀 놓고  냄새를 맡으며 함께 해가 움직이는 모습을 관찰하던 시간을 기억한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온기와 존재를 충만하게 느끼며 보낼  있었던 시간을.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주고받을  있어서 행복했던 나날을. 가끔씩 꿈을 꾸면 햇살이 은은하게 비치는 마당에서 나는 너와 함께 뛰어다닌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는다. 유년이 끝나고, 미성년 시절이 끝나고, 인생의 계절이 바뀌며 내가 커갈  나는 가끔씩 고개를 돌려 내가 받았던 사랑을 돌이켜 본다. 그러면 너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웃으며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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