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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 Oct 24. 2021

문 너머의 사람 (상)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급히 내려갈 채비를 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서 혼자 침대에 앉아 울먹였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집을 나서려던 발길을 돌려 내 방으로 와, 되려 웃으며 괜찮아,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다 언젠간 죽는 거야.라고 말하며 내 등을 연신 쓸고 꽉 안아주었다. 그러나 그 후로는 그날 대문을 나서던 엄마의 등만이 기억이 난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1960년에 중매로 결혼했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어땠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좋았다거나, 어색했다거나 하는 반응을 예상했는데, 답변을 듣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선을 본 첫날, 방문 밖으로 할아버지를 살며시 내다봤는데 그의 눈이 너무 크고 부리부리해서 그만 눈이 앞에서 뱅뱅 도는 것 같아 화들짝 놀랐다는 것이다. 눈이 어찌나 큰지 무서워서 울고 싶었다고 했다. 한참 웃고 나서, 그런데도 어떻게 결혼을 했냐고 질문하니 다른 말은 없이 "그때는 다 그랬다."라는 덤덤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옛날 사람들은 얼굴도 보지 않고 시집을 갔다고 덧붙이면서. 그러나 촌에서 자란 할머니는 사실 부산에서 온 할아버지가 싫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때는 부산 같은 도시에 살면 소위 말하는 "났다"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할머니는 1960년 5월 25일 결혼을 하였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서 더워서 시원한 옷을 입고 옛날 나이아가라 치마(색깔은 짙은 연두색에 저고리는 다홍색으로) 입고서 주택에서 결혼식 올리고 가마를 타고 천동 다리까지 가서 신랑이 운전하고(택시), 그때만 해도 차 귀할 때라. 남해 읍 가서 심천리에, 큰길에서 마당으로 차가 들어가서요…….”                         


신혼여행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귀했던 차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호강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결혼 후에 사업을 시작하려 했지만, 부산에 사는 큰 집 형님이 간곡히 부탁하여 형제를 돕겠다는 생각으로 그 집 일을 도와주러 큰집에 살림을 다시 차리게 되었다. 그런데 몇 개월이나 지났을까, 성정이 곧고 가정적이었던 그는, 형이 일은 뒷전이고 둘째 부인을 얻어서 희희낙락하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그대로 방에 들어가 둘째 부인을 안아서 마당에다 패대기를 쳤다고 한다.      


큰 집에서 할머니가 눈치 보면서 살림만 하는 것이 싫었던 할아버지는, 우리는 이렇게 큰집의 하수인같이 의미 없이 살면 안 된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부산으로 기술을 배우러 가라고 권유했다. 그는 아내를 떠나보낸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내내 손 편지를 부쳤다.                          

    

"子에게          

(…)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은 나 개인으로 산다는 용기를 가져 보라는 거요. 극한적으로 당신의 남편이 이 세상을...? 물론 젊은 여자의 신분으로 막연히 내 맡기는 이 남편을 원망할는지도 모르겠소마는 아무튼 한두 번 의논한 것이 아니오니 더욱 머리를 짜서 보람 있는 삶을 이룩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야를 좀 넓게 보라는 거요. (…)반사회적인 행위가 날로 줄을 이어가고 있소. 사회를 배워라 이 세상을 알라 이 말이 어떻게 하면 나 개인이 남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우리들은 언제든지 나도 배우고 당신도 배워서 화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때까지는 서로가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소."                         


할아버지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도 그런 그를 믿고 의지하며 살았다. 그러나 현모양처를 자신의 본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할머니에게 그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무엇보다도 부산에 가면 남편과도 떨어져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연고도 없어 혼자 지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마침 영도에 고향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그녀더러 오라고 하여서 그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러기를 22일, 할머니는 좌천동에 방을 하나 얻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다. 남부 민동에 있었던 부녀 직업 보도소에서 6개월 동안 편물 짜는 것을 배웠다.      


할머니는 신혼 시절, 부산에서 혼자 일을 배울 때 길가에 남자들이 옷을 얇게 입고 있으면 신랑도 저러고 있는가 싶은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대로 같이 살려고 하면 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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