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에 극적인 만남... 그 두 번째 이야기
나는 여행 중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카메라로 찍는 버릇이 생겼다. 일종의 메모 중독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마음에 드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의 소리, 공기까지 담기 위해 동영상 찍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다니엘과 데시의 집에 도착했을 때도 그랬다. 무려 14년 만에 만났으니까 얼마나 그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겠는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그 집 정원 뒤로 펼쳐진 푸른 밭과 하늘이여서 그것부터 찍고 그 다음에 다른 것들을 찍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내 카메라가 찰칵 소리를 내자 데시가 나를 불렀다.
"정민, 부탁이 있는데 우리 아들 사무엘 만큼은 사진 찍지 말아줄래? 우리 부부는 사무엘이 클 때까지 사무엘을 소셜 네트워크 공간 상에서 보호하고 싶어. 그리고 우리 집 사진 찍는 것은 좋은데 페이스북엔 올리지 않았으면 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워낙 유럽과 미국이 아동 납치, 아동 성범죄 등 아동과 관련된 범죄에 민감하고, 서양 문화권은 우리보다 사생활 보호에 좀 더 엄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페이스북을 비롯한 공개적인 곳에 사진을 올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사무엘이 성인이 되길 기다리는 수 밖에...
데시는 부탁의 말을 마친 후 나를 데리고 이 집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줬다. 1층은 거실과 식당으로 2층은 이들 부부와 사무엘의 침실, 서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데시는 안방으로 데려와 붙박이 옷장을 보여주며 내게 말했다.
"정민, 이 붙박이 장은 다니엘이 직접 만든거야. 어때?"
"정말요? 이거 정말 다니엘이 만들었다고요?
"응. 내가 디자인하고 다니엘이 직접 만들었어. 사실 이 집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내가 디자인하고 다니엘이 만들었어."
다니엘이 나에게 한 말까지 덧붙이면, 집에서 쓰는 선반, 옷장들은 다니엘이 직접 만들고 페인트칠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집의 인테리어 디자인과 조명, 소품 배치는 모두 데시의 몫. 여행을 자주 다니는 이들 부부는 세계 각지의 기념품들을 사서 모아 인테리어 소품으로 배치했다. 특히 집의 입구에 걸려있는 호주 전통악기 Digeridoo는 호주에 갈 때마다 하나씩 사서 총 3개를 들여왔다고 한다. 그리고 내 눈을 즐겁게 해준 조명 또한 데시의 안목으로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다니엘과 데시가 이 집의 인테리어를 완성시키기 까지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뮌헨에 살 때는 이런 좋은 집과 정원을 갖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는데, 푸하임에 오니 가능해졌다고 했다. 그리고 푸하임으로 이사와서 가능해진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건 사무엘의 교육 환경 변화였다. 사무엘은 푸하임으로 이사오면서 forest kindergaten (숲 속에 있는 유치원으로 해석 가능)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온종일 숲 속을 돌아다니며 교육을 받는 것이 사무엘을 비롯한 어린 아이들의 정서에 좋다는 것이었다.
올해 만 5세가 된 사무엘은 얼마 전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엄마 데시의 모국어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뮌헨 마리엔플랜츠 근처 스페인 어학원에 다닌다고 한다. 말하다가 종종 독일어와 영어가 헷갈릴 때도 있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다니엘이 말해줬다.
사실 내가 이 집에 왔을 때 가장 신났던 사람은 5살 짜리 꼬마 사무엘이었다. 처음 나를 볼 때는 낯을 가리더니 점점 나에게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집에 있는 여러 보드게임을 내 앞에 펼쳐놓고는 귀여운 목소리로
"Do you wanna play with me?" 라고 말한다.
내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면서 말하는데 내가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프라하에서 5시간 동안 버스 타느라 많이 피곤했지만 난 사무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사무엘은 서랍장에서 보드 게임 하나를 꺼내온다. 그렇게 30분 정도 게임을 하는데... 이 녀석 승부욕이 장난 아니다. 심지어 이기고 싶어서 편법까지 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사무엘과 내가 노는 동안 다니엘과 데시는 요리를 하고 야외 식탁에 상을 차렸다.
"사무엘은 밖에 상을 차려서 식사하는 것을 좋아해. 오늘 밖에서 밥을 먹는다고 하니 사무엘 기분이 좋아보이는구나."
사실 다니엘과 데시를 만나기 전에 가장 걱정했던 것은 사무엘이었다. 혹시나 사무엘이 낯선 이방인인 나를 보고 낯을 가리거나 피하진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여행을 많이 다녀서 그런지 사무엘은 이방인인 나를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놀아줄 친구가 하나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래서 사무엘은 매일 아침에 거실에서 나와 마주치면 놀자고 졸라댔다. 사무엘이 나를 너무 좋아해줬기 때문에 나는 다니엘의 집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날 식사는 볶음밥과 계란 후라이 그리고 독일 소시지였다. 데시가 이 밥이 내 입맛에 맞냐고 물어봤다. 자기가 만든 볶음밥을 쌀밥이 주식인 아시아인인 내가 먹는다니 여간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한 숟갈 떠먹어봤는데 싱거웠지만 밥 자체는 맛있었다. 사실 이 집에서 쌀밥을 먹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4년 전에도 데시가 볶음밥을 만들어 준 적이 있었고, 심지어 일본산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주기도 했다.
밥을 먹으면서 사무엘이 다니엘과 데시에게 귀여운 투정을 부린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며 데시가 한 마디 한다.
"난 다니엘과 결혼할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이를 낳을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어. 그런데 우리는 사무엘을 낳았고,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또다른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어."
"데시, 다니엘. 14년 전에 우리가 헤어질 때, 언젠가 이런 멋진 집에서 다시 만날거라고 생각해본 적 있어요?"
"아니. 전혀...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놀랍고... 그리고 13살짜리 꼬마가 14년이 흘러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는 것도 너무나 신기해. 그때 넌 우리보다 키도 작았잖아."
다니엘과 데시 그리고 나는 한참동안 추억을 회상했다. 집 앞 잔디밭에서 다니엘과 데시의 사촌 카를로스 그리고 내가 공놀이를 했던 것, 2층 내 방에서 다트 내기를 했던 것들... 한참동안 옛날 얘기를 하니까 이젠 현재의 나는 어떤지 호기심 많은 데시가 물어보기 시작한다.
대학교 전공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결혼은 했는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아이는 있는지,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그 모든 것까지 데시는 물어봤고 나는 그 질문에 모두 대답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사무엘은 다니엘과 데시에게 또다시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고 다니엘은 무뚝뚝하게 그 투정을 받아주면서 나에게 한마디 했다.
"정민, 오늘 날씨 정말 좋지? 그런데 내일부턴 흐릴거야. 그리고 일요일엔 눈이 내린다고 뉴스에 나왔어."
"Really?"
'내가 오는 길에 유채꽃이 만발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눈이 온다고? 그것도 4월 말에?'
나는 평소 다니엘이 뻥을 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일 모레 눈이 온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아까 뮌헨으로 오는 길에 유채꽃이 만발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여기가 강원도 철원도 아니고 4월에 눈이 내린다니 좀 황당했다.
저녁 식사가 끝났다. 다니엘과 데시가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나는 사무엘을 돌봐주기 시작했다. 사무엘은 "Do you wanna play Chess with me?"라고 묻는다. 그리고는 체스판을 갖고 온다. 사무엘은 조막만한 손으로 체스 말을 움직이면서 나와 놀기 시작했다.
한참 체스를 두다가 데시가 잠잘 시간이 되었다며 사무엘을 부른다. 사무엘이 잠잘 시간이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휴식시간이 허락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니엘과 데시는 게스트룸으로 안내하겠다며 나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게스트룸이 어디있다는 거지? 아까 2층에 올라갔을 땐 그런 방은 없었던 걸로 보이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다니엘이 거실 한 켠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불을 켜더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마치 호그와트 학교의 비밀의 방으로 가는 통로처럼...
그리고 그 통로엔 예상치 못한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