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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Dec 02. 2023

그녀를 보내버렸다

 방송판에서 넉 달을 버텼다


 이제야 다른 팀 연출부들과 한자리에 앉았다. 당시 여의도는 포장마차가 많았다. MBC 본사 앞에는 '문화쌀롱'이라고 불렸던 터줏대감 포장마차가 있었고, MP 앞에도, 해가 뉘엿해질 때쯤 분주히 자리를 깔았던 포장마차들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 거국적으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어묵 국물 한 숟갈에 소주 한 잔씩 들이켜니, 누군가 내게 물었다.


 "영 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다섯입니다..."

 "스물다섯?!"

모두가 놀랐다. 알고 보니 난 MP에서 가장 어렸다. 몇몇 팀에 동갑인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밑으론 없었다.

 "에이 뭘, 민증 까봐요.", "까봐라~ 까봐라~"

 "예?!" 이게 다 내 노안 때문이다. 민증을 까고, 그날부터 모두의 동생이 됐다.


 "근데 너 되게 오래 버틴다." 조연출 소민 누나가 말했다.

 "네? 왜요?"

 "뽀뽀뽀 FD들, 몇 달 안 하고 다 나가서 넌 언제까지 하나 했지. 거기 힘들지?"

 "네? 뭐... 그냥... 네. 힘들어요..." 누군가에게 처음 털어놨고, 들어줬다.


 "이거 계속할 거야?"

 "일단 겨울방학 동안 벌어서, MBC 아카데미 가려고요."

 "응? 거기 왜?" 조연출 정우 형이 물었다.

 "PD 과정 가보려고요."

정우 형이 마시려던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내가 거기 PD 과정 끝내고 온 데가 여긴데."

 "??!!"

 정우 형은 MBC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KBS에서 잠깐 일했다가, MP에 들어왔다고 했다. 근데 어차피, 현장 들어오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된다고도 했다.


 "가봤자 오는 데가 다시 여긴데, 뭐 하러 비싼 돈 버리고 거길 가. 에이, 가지 마."

 "아!"

 크게 깨달았다. 명료해졌다. 아카데미 진학은 집어치우고, 난 휴학을 선택했다.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싸움은 여전히 계속됐지만, 이젠 내게 형과 누나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너무나 웃겼다. 후에 다른 어떤 곳에서 일해도, 이렇게 재밌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 나보다 댓 살이 많았어도, 단 한 명도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선배라고 곤조를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같이 까이고, 같이 밤새우는 동료였다. '쥐를 잡자!' 같은 술자리 게임을 하지 않아도, 이야기와 깔깔대는 웃음만으로 공기를 꽉 채웠고, 그 자리에 언제나 나를 챙겨줬다. 함께 있으면 혼자만의 싸움이고 뭐고, 즐거웠다. 찾지 못했던 대학교의 로망을 난 또 여기서 찾고 말았다.


 이 와중에도 <뽀뽀뽀> 조연출은 내게 수많은 어택들을 날렸는데, 그때마다 형과 누나들의 도움으로 헤쳐 나갔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당시 FD는 테이프 수급이 일이었다. 녹화나 촬영, 편집 등에 쓸 디지베타 테이프가 떨어지면 안 됐다. 부족하면 경영관리팀에 물품 청구를 하고 수급해야 하는데, 문제는 테이프 수량은 정해져 있고, 청구하는 팀은 많다는 거였다. 경영관리팀은 신청한 만큼 안 주려고 했고, 제작팀들은 더 받으려고 했다. 그리고 선착순으로 줬다. 책잡히지 않으려고, 언제나 쓰는 만큼 정량씩 채워 넣던 내게, 조연출의 문자가 왔다.


 "디지베타 90분 테이프 1박스 더 받아놓으세요."

 이미, 이번 달 테이프 분출이 끝나버렸는데 1박스라니. 당장 쓸 스케줄도 없는데 테이프 10권이라니. 엿 먹이네. 가끔 경영관리팀에서 비상용으로 쟁여놓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어 읍소했지만,


 "안 돼. 없어. 니들은 왜 맨날 갑자기 와서 이러냐?"

 "죄송합니다..."

터덜터덜 조연출 소민 누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나... 혹시 디지베타 90분 테이프 좀 있으세요?"

 "왜? 얼마나?"

 "한 박스요..."

수량에 놀랐는지, 내 얼굴이 똥빛이라 놀랐는지, 여하튼 놀란 소민 누나가 말했다.

 "그렇게는 없는데... 잠깐 있어봐."

그녀는 터프했다. 길 잃은 아이, 집 찾아주려는 것 마냥, 나를 데리고 다른 팀들을 돌며 갈취를 시작했다.

 "영택이가 테이프 필요하대. 2권씩 내놔."

 "!"

 

 IMF 금모으기도 아닌데, 금세 한 박스가 만들어졌다. 아... 누나, 고마워요. 십시일반 모인 그 테이프들은 다음 달, 내가 더 청구해서 갚기로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뽀뽀뽀> 조연출이 급하게 찾은 테이프는 아무 데도 쓰질 않았다. 몇 주 후, 다시 형과 누나들에게 돌려줬다.


 또, 편집실 확보도 일이었다. MP의 편집실은 다섯 개가 있었는데, 항상 풀로 돌아갔다. '○월 ○일, 어떤 팀이 사용합니다'란 프린트를 붙여놔도, 유명무실이었다. 사람이 없으면 누군가 뜯어버려 바닥에 나뒹굴기 일쑤였다. 편집 중이던 흔적이나 사람이 없다면, 맡는 사람이 임자였다. 그래서 잠시 나갈 때는 일부러 테이프를 어지럽게 늘어놓기도 했고, 모두가 오버로드마냥 영혼 없이 편집실을 방황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팀과 교류가 없는 <뽀뽀뽀> 조연출은, 편집실을 한번 쓱 둘러보고 늘 방이 없다며 퇴근해 버렸다. 나는 밤을 새우고 기다리거나, 그래도 풀로 돌아가면 형과 누나들에게 부탁했다.


 "형, 죄송한데 언제 쉬세요? 쉬실 때 제가 쓰면 안 돼요?"

 "그래! 너한테 먼저 연락할게."

그렇게 짬짬이 내게 맡겨진 편집을 끝냈다. PD님이 조연출에게 말했다.

 "넌 왜 요즘에 편집을 다 못 끝내니?"

 "편집실이 없어서 못 했어요."

조연출이 여전히, PD님 대면 전용 얼굴인,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PD님이 덧붙였다.

 "그럼 영택이 얘는 편집실도 없는데, 어떻게 다 했다니?"


 와... 그때 그녀의 그 표정. 이런 게 인프라의 힘인가! 그런 사소한 일들이 반복됐고, 조금씩 PD님도 내게 유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고, <뽀뽀뽀> 스태프들의 일들을 처리해주다 보니 평판이 좋아졌고, 다른 팀 연출부들과 함께하는 사이, 조연출 그녀는 독방에서 고립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PD님의 호출을 받았다. <뽀뽀뽀> 방으로 오라고 했다. 문을 열었다. 조연출이 PD님 옆에서 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아, 또 뭐야...


 "영택아. 네가 잘하는 건 알겠는데, 선배 예우 안 하는 사람은 필요 없다."

 "?!... 죄송합니다..."

 하다. 무슨 모함을 한 건지 뻔하지만, 예상은 해도 대처는 안 된다. 또 목소리가 떨려온다. 달라진 게 있다면, 조연출 편만 들던 PD님이, 내 앞에서 조연출도 깼다는 거다. 너도 이런 문제로 언제까지 이럴 거냐며. 이것도 네 능력 부족이라며.




 <뽀뽀뽀> PD님은 여자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당시, <뽀뽀뽀>는 1주일에 3편, 스튜디오 한 번 녹화에 2주 치, 6편을 떴다. 대본이 초등 전과 수준이었다. 200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런데 PD님은 대본을 쓴 작가보다, 대본을 더 꿰고 있었다.


 "4편에 인형극 하는 그 씬 있잖아요? 작가님."

 "네네. 잠시만요... 어디더라." 작가님이 책 대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133페이지 밑에서 셋째 줄이요."

 "!!!"


 설마 다 외우고 있는 건가! 나도 녹화 소품이나 더빙 대본 준비 때문에, 녹화 회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경이로웠다. 이 정도는 해야 정직원 PD 하는구나. 그렇게 녹화에 들어가면, 점심 식사 후부터 늦으면 밤 10시까지 달렸다. 부조에 올라간 PD님은 8시간 넘게 지치지 않고, 인터컴으로 지시를 날렸다. 반면, 인터컴을 끼고 있는 내 귀는 피가 날 지경이었다.


 "됐니? 왜 아직도 준비가 안 됐니? 얼마나 기다려야 되니?"

 안 그래도 나는 발음이 엉망인데, 인터컴을 통해 대답하니 더 뭉개졌다. PD님과 부조 스태프들이 알아듣지 못해, 같은 대답을 두세 번 반복했다. 하지만 그건 견딜만했다.


 스튜디오 플로어에는 모두 각자 사정이 있었다. 인형극 팀이 인형을 준비하려면 물리적인 시간이 걸렸고, 아역배우들은 간혹 화장실이 급하다고 했으며, 빨리 갈아입기에 출연자의 의상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이건 채근한다고 빨리 해결되는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인터컴엔 불이 났다.


 "3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안 됐니? 뭐 한 거니?"

 "......"

아니, 시간이 걸린다고 방금 얘기했는데, 어쩌란 거지?

 "왜 대답이 없니? 응?"

 "네, 한 번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나도 안 된다고 여기는 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게 죄스럽고 미안했다. 스태프들은, 그렇게는 안 된다고 PD님에게 확실히 전하라며 짜증을 냈고, PD님은 어떻게든 준비해 내라며 인터컴으로 때렸고, 난 중간에 껴버린, 지옥의 8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건 쇼였다. 녹화가 끝나면 서로 수고했다며 웃으며 헤어졌다. 스태프들은 PD에게 전할 수 없는 볼멘소리를 누군가에게 표현은 해야 했고, 그게 나였고, PD님은 본사 정직원 부조 스태프들 틈바구니에 홀로 던져진 자회사 PD로서, 내게 액션을 취한 것뿐이었다. 녹화 시간이 길어지면 본사 스태프들은 곤조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 곤조를 달래주기 위해선 같은 팀을 쪼아댈 수밖에 없었다. 알지만 녹화는 언제나 멘탈이 털렸다.

  

 빠른 녹화 종료를 위해 플로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또 있었는데, 그건 주로 조연출에게서 행해졌다. 일곱 살에서 아홉 살 사이의 아역배우들은 연기를 하고, 춤을 추고, 노래했다. 경력직 선배들이라고 해도 아직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컨디션에 따라서, 혹은 숙지를 못해서 계속 NG가 나는 경우가 있었다. 조연출은 아이들을 혼내지 않았다. 대신 녹화장에 같이 온 엄마들을 호출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 엄마들을 깼다.


 "어머니, 쟤 연습은 제대로 시키셨어요? 도대체 오늘 왜 이러는 거죠?"


 북적한 스튜디오는 한순간 조용해지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하는 엄마가 깨지는 모습을 보는 아이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아이들은 대처 방법을 알고 있다. 하나같이 애써 다른 곳을 본다. 그리고 녹화가 시작되면, 정말로 열심히, 웃으며 춤추고 노래한다. OK 컷이 나고 카메라가 꺼지면, 웃음을 잃는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들 행복을 위해 만드는 프로그램 아닌가? 정작 그걸 만드는 아이들은 웃음을 잃었다.   


 아이들 본인이 하고 싶은 건지, 등 떠밀린 건지, 내 아이를 스타로 만들고 싶은 부모들과 함께 방송국에 온다. 그리고 평생 안 겪어도 좋았을 뻔한 경험을 한다.

 <뽀뽀뽀> 스태프들은 모두 예외 없이 이 아이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일은 일인 건가. 공과 사라는 건가. 여기는 학교가 아니고 방송판이라는 건가. 너희는 아이가 아니라 프로라는 건가. 시청자들의 행복을 위해, 너희들은 희생하라는 건가. 프로니까?...




 그렇게 8개월이 지났고, <뽀뽀뽀>에 마음이 떠나가고 있었다. 그때쯤 난 새로 생긴 <TV 완전정복>이라는 프로그램의 조연출 형에게 제안을 받았다. 자신은 방송이 적성에 안 맞는다며 떠난단다. 그리고 자신의 후임 자리에 날 소개하겠다는 거였다.


 "영택아, 언제까지 FD 할 거니? 조연출도 해봐야지."

 고민됐다. 그런데 <뽀뽀뽀> 폐지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희한하게도 다들 정확한 사실을 몰랐다. PD님마저 '본사에서 그렇게 결정을 내릴 것 같다'고 하셨고, 이번 녹화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며, 스튜디오 녹화를 끝내고 전체 스태프와 쫑파티까지 했다.


 "영택아, 넌 어떻게 할 거니?" 쫑파티에서 PD님이 물었다.

 "...<TV 완전정복>팀에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잘됐다. 넌 잘할 거야."


 하지만 폐지된다던 <뽀뽀뽀>는 없어지지 않았고, 난 미리 약속된 <TV 완전정복>팀으로 넘어갔다. <뽀뽀뽀>의 내 후임 FD로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작은 여자애가 들어왔다. 조연출은 여전히 골방에 버티고 있는데 괜찮을까. 이 아이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떠나는 것 같아 싱숭생숭했다. 나는 늘 사무실에 있으니까, 모르거나 안 되는 게 있으면 한밤중이라도 찾으라고 했다. 어떻게든 도와줄게.


 몇 달 후, 그 후임 여자애가 말했다.

 "오빠! 선물이 있어! 이리 와봐."

 "응? 왜, 뭔데?" 그녀가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조연출, 보내버렸어."

 "!!!"


 조연출은 여전히 후임에게 만행을 일삼았고, 그 조그만 여자애는 나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증거를 차곡차곡 모아 PD님과 독대했다. 그리고 정말 말 그대로, 보내버렸다.


 조연출은 제작비 횡령으로 잘렸다.


 정말 현명한 아이다. 이 조그만 여자애는 나보다 수백 배, 수천 배는 강하구나! 다른 사람들은 내막을 몰랐고, 작가님들은 수군댔다. 조연출이 영국 BBC에 자리가 생겨서, 그쪽으로 떠난다고 본인들에게 말했단다. 팩트인지 아닌지, 그 후로 아무도 그녀를 본 사람은 없었다.


 조연출님. 꼭 BBC에서 국위 선양하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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