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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Dec 03. 2023

자해 공갈단

FD 9개월째, 조연출이 됐다


 <뽀뽀뽀>와는 완전 성격이 다른 MBC <TV 완전정복>팀에 들어갔다. 그 프로그램은 MBC 편성국에서, 방영 중인 MBC 프로그램을 홍보하려고 기획한, MBC TV 가이드 프로그램이었다. MBC 프로그램을 활용한 자료 구성물 코너와 야외촬영 구성물 코너를 스튜디오 녹화와 버무려 만들어냈다.


출처 MBC


 그곳에서 성 PD님이란 30대 남자를 만났다. 선임 조연출이 나가며, 이분이 나의 사수라고 소개해줬다. 감개무량. 나에게도 사수란 게 생기다니.


 "안녕하세요."

 "응. 잘해보자."

 따뜻한 미소를 가진 그는 훈남이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스타일도 좋았다. 그렇지만 가장 특이했던 건, 온몸에 넘쳐흐르는 여유였다. PD 특유의 '찌듦'이 없었다. 예술가의 아우라가 백라이트처럼 주위를 밝혔다.


 이 팀은 PD가 2명인데, 메인 PD님은 MP 정직원이고, 성 PD님은 프리랜서였다. 직원이 아닌 PD는 그때 처음 봤다. 그런데도 정직원 PD님들의 인정과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알고 보니 메인 PD님과 성 PD님은, 내가 학창 시절 즐겨보던 <박상원의 아름다운 TV 얼굴>을 함께 했다고 했다. 그리고 성 PD님이 코너 중 하나인 <셀프카메라>를 만들었다고도 했다.


성 PD님은 전설의 <셀프카메라>를 기획하고, 만드셨다.


 와... 정말 대단하신 분이 내 사수가 됐다. 곁에 붙어서 착실 배우리라! 굳은 다짐을 하고,

나는 방치됐다.


 성 PD님은 바쁘셨다. 사무실에 오질 않았다. 개인사업자를 내고 활동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성 PD님의 사업체에 소속된 모양이었다. 며칠 후 급여 날, 통장에 모르는 상호로 돈이 들어왔다.


 "저, 이 상호가 뭔지 아세요?"

 "응? 성 PD님 업체야. 너 거기 통해서 돈 나가잖아."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그분 직원이 됐다. 그리고 <TV 완전정복>팀의 모든 사람이, 내게 닦달했다.     


 "성 PD님, 언제 사무실 오세요? 촬영 얘기 해야 되는데?" 작가님들이 닦달했다.

 "성 PD, 어디래? 내일이 종편 날이잖아, 가편은 다 된 거야?" 메인 PD님이 닦달했다.

 "??? 아니, 저도 잘 모르겠..."

 "영 씨, 거기 직원 아니에요? 영 씨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그걸!"


 어쩌지. 저도 만난 지 며칠 안 돼서, 그분 잘 모른다고요. 하지만 언제나 그런 말을 못 하던 나는, 그저 성 PD님의 전화번호를 누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낮에는 전화를 거의 받지 않으셨다. 그 모습을 앞에서 확인해야 닦달이 멈췄다. 성 PD님의 전화는 늘, 닦달하던 사람들이 모두 퇴근한 밤이 되어서야 왔다.     


 "응, 전화했었구나?" 그 목소리는 언제나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

 "편집실 좀 있니? 1시간 후에 갈 테니까, 편집실 좀 맡아줄래?"

 성 PD님이 안 계신 동안에도, 맡은 일을 끝내느라 이틀째 집에 못 들어간 나는, 그렇게 그날도 집에 가길 포기했다. 성 PD님의 편집 준비를 마치고 편집실을 맡아 대기 탔다. 1시간 후에 온다던 그분은 늘 두세 시간 후에 오셨다.     


 "아직 있었구나?"

 3일 만에 처음 뵌 성 PD님은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이분은 천성이 그랬다. 후에 성 PD님과 일하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얼굴 찌푸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갈굼이 없었다. 그리고 집에 가란 말도 없었다.


 그렇게 가편을 하시는 날엔, 성 PD님 뒤에 앉아있었다. 성 PD님은 가끔 '커피 좀 타 줄래?'란 말을 제외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르침 없는 편집실은 조용했다. 그때쯤엔 나도, 밤을 하루 이틀 정도 새운 상태라 잠이 쏟아졌다. 어떻게 편집하시는지 보는 것도 공부지만, 눈은 무거웠다.     


 "세수 좀 하고 오겠습니다."

 "응~ 그래~"

 "담배 좀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응~ 그래~"


 한마디도 안 할 거면 대체 왜 집에 가란 말조차 없는가? 졸려서 눈에 뵈는 게 없는데 내일, 맑은 정신으로 편집본을 뜯어보는 게 더 공부되는 거 아닐까?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몹쓸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떨어지자! 졸다가 의자에서 떨어지는 거야! 그럼 가서 좀 자라고 하시겠지!


 군대에서 4km 아침 구보를 하던 이등병 때 생각했다. 저 수로에 빠져 굴러 다리라도 부러지면, 당분간 구보에서 열외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실행에 옮기자.


 우당탕탕!


 성 PD님은 고개를 돌렸고, 씨익 웃고, 다시 편집을 이어갔다. 그렇게 졸리면 눈 좀 붙이란, 기대했던 반응도 없었다. 뻘쭘하게 일어나 다시 의자에 앉아 아침을 맞이했다. 몇 년 후, 다시 성 PD님과 일하면서 알게 됐는데, 성 PD님은 그냥 자고 오겠다고 해도 "응~ 그래~"하시는 분이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PD라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 할 엄두를 못 냈다. 나만 소심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못났다. 못났어.

 마음이 작은 친구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혼자 판단하고 결정해서 나처럼 바보 같은 행동은 안 했으면 좋겠다. 세상일은 말이든 행동이든, 일단 표현하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때도 많더라. 나도 그랬으면 꿀잠 잤을 텐데.




 방치됐던 나를 챙겨준 건 <TV 완전정복>팀의 또 다른 조연출 형이었다. PD도 두 명이었고 조연출도 나 포함 두 명이었는데, 그 형은 언론고시를 뚫은 MP 정직원이었다. 조연출 형과 누나들이 모두 재미있었지만 이 형만큼 웃기는 사람은 없었다. 개그맨처럼 웃긴 게 아니었다. 말을 정말 잘했다. 빠져 들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위트가 넘치고 주옥같았다. 이것이 배운 의 개그인가. 성 PD님처럼 이 형도 여유가 흘러넘쳤고, 매번 내게 말했다.     


 "영택아, 산책이나 가자."


 가을이었고, 낙엽도 쌓여갔고, 여의도 길바닥에 떨어진 은행을 피해 가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 형 얘기를 듣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리프레시가 됐다. 형은 시트콤과 드라마를 하고 싶어서 PD가 됐다고 했다. 방송사 최종면접에서는 싸이의 '연예인' 노래를 부르며 춤췄다고도 했다.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항상 즐겁게 해 줄게요'라는 가사를 'MBC의 PD가 되어 항상 즐겁게 해 줄게요'라는 식으로 개사해서 불렀다고 했다.

 와... 이 정도는 해야 정직원 되는구나. 그리고 늘 내게 말했다.


 "영택아, 학교 다시 가라. 여기서 뭐 하니. 토익 해서 언론고시 봐라."

 "형, 근데 전 별로 언론고시 생각이 없어요."

 "아휴... 쯧쯧쯧."


 따뜻한 조언은 물론이고, 배고픈 나에게 늘, 회사 앞 포장마차의 따뜻한 떡볶이와 붕어빵 사줬다. 그리고 그날도 포장마차에서 말했다.


 "영택아, 너만 알고 있어. 나 KBS 간다."

 "!!! 진짜요?!"

 "응, 경력 PD로 붙었어. 너만 알고 있어. 그리고 학교 가라."


 그 말을 남기고 떠나 KBS 본사 PD가 된 형은 <스펀지>를 하게 됐다고 들었고, 당시 최고 인기였던 <1박 2일>팀에 들어갔고, 몇 년 후엔 CJ로 이적하면서 tvN에 그 형이 만든 드라마가 나왔다. 드라마 감독이 되고 만다더니, 정말 되고 말았어!

 극내향형 인간의 인간관계가 흔히 그러듯, 내 쪽에서 연락을 하지 않아 연이 끊겼지만, 너무 기뻤다. 정말 멋있다. 진짜 대단한 형이야!


 돌이켜보면, 성 PD님과 조연출 형에게 부러웠던 것, 배우고 싶은 것, 닮고 싶었던 건, 제작 능력보다그 여유였다. 모두가 바쁘고 지쳐있는 와중에도 그분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그런 건, 그런 '척'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연출 형이 떠난 후에도, 난 여유란 1도 찾을 수 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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