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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Dec 10. 2023

성덕

탄탄대로는 펼쳐지지 않았다.

 

 <에일리&엠버의 어느 멋진 날>은 운이 좋아, 메인 감독으로 연출하게 됐을 뿐이었다.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고, 2015년엔 MBC, SBS의 쇼와 다큐 등 특집방송을 전전했다.


 그러다 KBS의 한 리얼리티 예능물 2차 편집팀으로 참여하게 됐다. 개인 사정으로 중호가 KBS 측과 첫 미팅을 했고, 그 후 편집팀에 합류했다. 편집팀은 KBS가 긁어모은 PD들로 10명이나 됐고, 중호와 나도 그중 일부였다. 우선은 5회까지 요청받았지만 가능하면 10회까지 해달란다. 10회면 거의 넉 달은 살 수 있겠구나. 다행이다. 중호와 나는 10회를 다짐했다.


 모두 분량을 나눠 받아 각자의 편집실에서 밤을 새웠다. 그리고 3회 편집 중이었던 밤, 일이 발생했다. KBS PD가 편집실을 찾아와 어디까지 했는지 보잔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 이제 이 정도 붙이면 어떻게 합니까!"

 약속한 시사일은 아직 3일 남았는데, 왜 이러시지.


 "여기는 힘을 줘야 하는 부분이라서, 좀 오래 걸렸습니다... 시사일까진 맞출 수 있습니다."

PD의 소리가 커졌다.

 "겨우 이거 붙여놓고, 다 할 수 있긴 해요?" 왜 이렇게 시비조시지.

 "네, 할 수 있습니다."

 "음악도 하나도 안 깔아놨잖아요!"

음악은 왜지? 음악은 보통 후반작업으로 녹음실에서 넣었는데...


 "... 음악은 녹음실에서 넣지 않나요? MBC에선 그랬는데..."


 내가 실언을 했다. 발작 버튼을 눌렀다. KBS 간부 앞에서 MBC와 비교질을 해버렸다. 순간 말을 잃은 그분은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호출했다.     


 "이리 좀 와보세요!"

 중호가 편집실에 왔다. 왜 중호한테 전화를 한 거지? 어리둥절한 중호에게 PD가 버럭 소리쳤다.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입니까?"

  "... 선밴데요."


 중호를 선배로 알고 있었던 그분은 씩씩대며 편집실을 나갔고, 중호는 무슨 일이냐며 물었고, 이번엔 내가 말을 잃었고, 4회부터는 1차 편집팀으로 강등됐다.

 유리 멘탈이 산산조각 났다. 중호 볼 낯이 없었다. 그리고 겨우 요청받은 5회까지 끝냈다. 중호에게 말했다.


 "중호야. 난 나가야 될 거 같아. 버티기가 힘드네. 넌 어떻게 할래?"

 "..."

중호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중호야. 넌 여기 있어. 난 영업도 못 해서 일도 못 따는데, 나랑 같이 있으면 굶기밖에 더 하겠냐... 여기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넌 잘하니까 괜찮아."


 그리고 헤어졌다. 중호는 외롭고, 강하게 혼자서 굴렀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해피투게더>, <런닝맨> 같은 굵직한 프로그램도 맡았다. 그리고 내가 못 이룬 걸 대신 이뤘다.

 프리랜서로,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프로그램의 메인 PD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필드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 정말 리스펙이다. 멋있다.




 그 후 나는 실의에 빠져 반년 넘게 허우적댔다. 콜들이 와도, 그저 집에 숨었다. 재기불능, 히키코모리였다. 벌써 그만두기엔 미련이 남는데, 방송을 다시 할 자신도, 에너지도 없다. 그런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핸드폰이 울렸다. <어느 멋진 날> PD였다.


 <피크닉 라이브 소풍>이라는 음악 프로그램을 맡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은 또, 감독이 필요했다. 거절하려고 할 때 PD님이 덧붙였다.


 "<어느 멋진 날> 메인 작가님도 하기로 했어."

 "!!!"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순전히 그 이유로, 난 <피크닉 라이브 소풍> 팀에 합류했다. 두 번째, 메인 연출이었다.     


출처 MBC플러스


 <피크닉 라이브 소풍>은 가수들의 아날로그 공연을, 멋진 풍경과 함께 담아내는 프로그램이었다. 2016년 4월, 장범준 편부터 2016년 10월, 시오엔 편까지, 은퇴작이라는 생각으로 가진 모든 걸 쏟아부었다. 한 살 많은 누나 작가님은 여전히 엄마 같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고맙습니다.


 프로그램은 예산이 모자랐다. 내 페이도 다운됐지만 그런 거 아무 상관없었다. <어느 멋진 날>처럼 즐거웠다. 예산을 아끼기 위해, 하루에 3~4팀을 찍어 한 달을 내보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촬영을 위해, 레퍼런스를 뒤지고, 혼자 답사를 갔다 오고, 머릿속에 무대를 그리고 상상했다.


네이버 '뮤지션리그'와 함께 했던 <피크닉 라이브 소풍> 출연자 후보 리스트.


 스태프들은 음향 팀, 악기 팀 등이 추가돼 <어느 멋진 날> 때보다 더 많아졌다. 빨개지는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 때문에 전체 회의를 주재하지 못하는 난 <어느 멋진 날>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태프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며 상상해왔던 그림을 설명했다. <어느 멋진 날>에서는 10번 정도 같은 설명을 했는데, 여기선 20번 가까이 됐다.


 또 좋은 팁을 얻었다. 스태프들에게 레퍼런스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가 어버버 대며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영상이 특효였다. 스태프들은 '아! 이 얘기였어요?' 하며 바로 이해했다. 역시 옛말 틀린 게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출처 MBC플러스


 그리고 난 성덕이 됐다. 대학생 때부터 좋아했던 <라이너스의 담요>, <브로콜리너마저>, <김반장과 윈디시티>의 노래를 직접 듣고, 무대를 연출했다.

 <라이너스의 담요>의 연진 님이 <피크닉>을 부르며 살랑살랑 폴짝폴짝 뛰시던 모습, <브로콜리너마저>의 향기 님이 멋진 기타 연주를 끝내고 수줍게 웃으시던 모습, 자취방에서 혼자 누워 듣던 김반장 님의 <Think About' Chu>가 내가 연출한 한강 변의 무대에서 울려 퍼지던 그날 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미처 몰랐었던 훌륭한 뮤지션들을 만났고, 아직도 그분들의 노래를 듣고 있다.


출처 MBC플러스


 재기불능이던 나를 정말 많은 분이 일으켜 세우셨다. 특히 정신적 지주였던 작가님, 늘 말씀 드린 것 이상의 무대 분위기를 만들어 주신 조명감독님, 공연 경험이 많았던 든든한 남자 연출님, 언제나 같이 밤새웠던 여자 연출님. 정말 감사합니다. 수상 소감이 돼 버렸다.


 여하튼, 더 이상 어떻게 못 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지금도 기력이 딸릴 때, 다시 본다. 남들은 옛날 자기 작품을 보면 부족한 게 보이고 창피하다고 하는데, 난 뻑이 간다. 그 KBS PD님이 이래서 PD가 직접 음악을 넣어야 한다고 발작하셨나 보다. 볼 때마다 '잘했구나, 왜 이렇게 잘했지, 다시 이렇게 할 수 있나?' 자뻑을 하고 에너지를 얻는다.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다'더니, 또 교과서가 맞았다. 역시 교과서.


 그리고 첫째가 태어났다. 결정의 시간이었다. 방송을 계속해서, 일주일에 반 이상, 집에 없는 아빠가 될 것이냐.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이냐.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 아버지는 지방 출장으로 보름에 한 번 집에 오셨고,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안을 찾았다. TV 방송은 그만 접고, 인터넷 라이브 플랫폼 회사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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