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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Dec 09. 2023

과정의 희열

너, 아이돌 프로그램 해볼래?


 <파이널 어드벤처>를 함께했던 선배의 연락이 왔다. MBC플러스에 아이돌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있는데, 본인은 메인 PD와 안 맞아 기획 단계에서 빠졌다고 했다. 역시, 이번에도 펑크 난 프로그램, 대타구나. 어쨌든, 미팅하러 MBC플러스에 갔다.


 그 자리엔 메인 PD님과 메인 작가님이 있었다. 메인 작가님은 <파이널 어드벤처>의 왕 작가님이셨다. 이젠 이 프로그램 왕 작가를 하시는구나. 왕 작가님이 메인 PD님에게 말했다.


 "이 친구 잘하는 친구야~ 근데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왕 작가님은 메인 PD님에게, 이름도 모르는 내 칭찬을 늘어놨다. 본인이 소개한 PD가 나가버려서, 민망도 하고, 안심도 시키려고 그러시는 모양이었다. 메인 PD님은 의심의 눈초리로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출처 MBC플러스


 당시, MBC플러스의 뮤직 채널에서는 <어느 멋진 날>이라는 아이돌 여행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프랜차이즈로 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가수 에일리 님과 엠버 님이 나온다고 했다. 둘은 친구라고 했고, 여행지는 제주도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는 그냥 다 맡기는 스타일이에요. 진행 상황이나 이런 보고만 잘해주세요."

 "아... 예."

 그러면서, 다 맡기는 PD는 한 번도 없었다. 대답이 미적지근하자, 메인 PD님은 한층 더 의심의 눈길을 보내며 확답을 요구했다.


 "메인 PD라고 생각해 주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작가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테니까요."

 "!!!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난 메인 PD 아닌, 메인 PD가 됐다. 행정이 아닌 전체 연출을 책임졌으니, 감독이란 말이 더 어울리겠다. 감독으로서 부탁했다.


 "저랑 같이하는 중호라는 PD가 있는데요."

 "네, 들었어요."

 "잘합니다. 저랑 같은 분량을 마는 PD예요. 이번에도 그럴 거고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말을 정리한 후, 뱉었다.

 "저하고 페이를 맞춰주실 수 있을까요? 예산이 없으면 제걸 좀 줄이셔도 됩니다."


 중호는 정말 잘했다. 중호가 편집한 부분은 손댈 곳이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 지구력 부족인 날 살렸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살어. 이 더럽고 불공정한 세상. 몸값 때문에 엿 같은 꼴을 겪어왔던 난, 중호만큼은 어떻게든 빨리 몸값을 올리고 싶었다. 메인 PD님은 망설였지만, 결국 얼추 비슷하게 맞춰줬다. 감사합니다.




 미팅이 잘 끝난 후, 왕 작가님은 작가실에 가자고 했다. 좋은 작가들로 팀을 꾸렸다며, 자랑하고 싶은 눈치셨다. 그리고 작가실의 문을 열었다.


 "어?!", "어?!"

왕 작가님이 말했다.

 "둘이 아니?"     


  <TV 완전정복> 작가님이 계셨다. 모든 작가님이 내게 닦달할 때, 그러지 않은 유일한 분이었다. 와아, 이제 세컨 작가가 되셨구나. 아니다. 왕 작가님은 일을 안 하시니까, 실질적인 메인 작가였다. 메인 작가가 되다니, 세월 참. 후에 들으니 작가님도 나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고, 그 자리에서 우린 상전벽해를 느꼈다.

 재회한 그녀는 평소엔 부드러웠지만, 할 말을 할 땐 당당했고, 소녀 같으면서도 엄마 같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옛날 그분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메인 작가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내 삶도 녹록지 않았지만, 그동안 어떤 삶을 사신 거예요...


 여하튼, 내향적인 나로선 다행이었다. 메인 작가님은 아는 사람이었고, 언제나처럼 중호도 함께였다. 소개받은 다른 작가님 두 명과 처음 만난 연출 두 명도 모두 잘하고, 착했다. 멤버가 좋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며 알게 됐다.


 '그냥 좋은 레벨이 아니구나...'


 이 팀엔 케미가 있었다. 연출진, 작가진 서로 날이 서지도 않았고, 기싸움도 없었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저자세도 아니었다. 그냥, 서로 주파수가 맞았다. 촬영 전부터, 모두가 함께 제주도의 아이템을 찾았다. 에일리 님과 엠버 님이 평소에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출연자 맞춤형으로 그들이 제주도에서 신이 날 곳들을 상상하면서 여행 루트를 짰다. 그리고 출연자들이 신나기 전에, 모두가 본인 여행 계획 짜듯 신나 버렸다. 안 싸운다고 프로그램이 성공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촬영 전부터 즐거웠다.


 모두가 이상하게 열심이었다. 제주도 답사에선 바다 공포증이 있던 작가님이, 직접 시뮬레이션해봐야 한다며, '씨워킹'을 하러 바다로 입수했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리고 제주도에서 첫 씬은, 에일리 님과 엠버 님이 '미로 공원'에서 서로를 찾아 첫 만남을 하는 거였다. 미로마다 갈림길 바닥에 '절친 퀴즈'라는 문제지를 붙이고, 정답을 맞혀야 문제지의 화살표는 올바른 길을 인도했다.


출처 MBC플러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직 미로 공원에 문제지를 세팅하지도 않았는데, 출연자들이 너무 일찍 도착한 것이다. 작가님이 말했다.


 "영택아, 어떻게 해???"

 "뛰어야지, 누나!!!"


 좀 기다리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우린 '너무 기다리게 하면 흥이 깨질 텐데'라는 생각뿐이었다. 메인 PD라는 사람과 메인 작가라는 사람이, 문제지를 나눠 들고 발에 땀나게 뛰었다. 제주도는 역시 삼다도였다. 바람이 많아서 문제지를 바닥에 붙일 수가 없었고, 작가님과 나는 서로 말할 새도 없이 땅에 망치질을 해댔다. 출연자에게 약속한 촬영 스타트 3분 전,  모든 작업이 완료됐고, 땀에 쩔어버린 우린, 서로 씨익 웃었다.


당시 짰던 <어느 멋진 날> 후반작업 스케줄. 지켜지진 않았다.


 그렇게 제주도에서도, 누구 할 거 없이 서로 얘기하고, 도와가며, 고생했다. 이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후반 과정도 달랐다. 그동안 메인 PD님들이든, 작가님들이든 누군가 편집본에 의견 제시를 하면 태클이라 느낀 적이, 솔직히 거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난 인성이 썩어서, 공동작업인 방송은 적성에 안 맞는구나'란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작가님들 의견에 수긍될 때가 많았다. 또 그렇게 수정하면 좋아졌다. 함께한 과정을 통해서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 잘 만드는 거, 그 목표에 모두가 진심이란 걸. 시사 때, 근거도 빈약한 의견들을 던져대고 '오늘 밥벌이는 다 했구나' 여기는 게 아니란 걸. 그래서 편집으로 아무리 밤을 새웠어도, 언짢지가 않았다. 그래. <파이널 어드벤처> 편집감독님의 수정 지시도 언짢지 않았었지.


그래서 알게 됐다. 시사로 수없이 분노한 날들, 그건 내 인성 문제 때문이 아니란 걸. 방송은 공동작업이고, 모두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백날 떠들어대고, 세뇌시키면 뭐 하나. 진짜 함께 뛰지 않으면, 보고 겪지 않으면, 마음이 받아들이질 않는데.


함께 밤새웠던 작가님의 <어느 멋진 날> 편집 구성안


 그동안, 모두들 함께한다고 했지만 자기 일 끝나면 땡이었다. 메인 PD와 작가는 합의한 촬영 대본을 내게 휙 던지고 끝이다. 그럼 그때부터 난 혼자만의 싸움을 한다. 촬영하고, 편집하고, 밤새웠다. 그러니 편집본은 '내 새끼'가 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시사에서의 의견들도 '내 새끼'를 향한 린치라고 여기게 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자리가 깡패라고, 근거도 빈약해 수긍도 안 되는 지시들로 '내 새끼'를 뜯어고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짢고, 아팠던 건 당연했다. 지금도 필드에서 열받고 아파하는 분들. 그건 당연한 거예요. 당신 문제가 아니에요. 자괴감에 빠지지 마세요.


 어쨌든 그래서 난 메인 PD가 돼야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뜻대로 관철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내 거를 만들 수 있고, 그래야 아프지 않고 행복할 거라고 착각했다. 그래본 적이 없으니까. 로또에 맞으면 행복해지겠지. 뭐 그런 거였다. 하지만 메인 PD가 돼 보니 알게 됐다.


 '그딴 거 뭐, 그냥 함께 뛰면, 즐겁구나.'


 어차피 인생, 행복해지려고 사는 거면, 프로그램이 내 거든, 남 거든, 그게 뭔 상관일까. 지금 이렇게 과정부터 행복해버렸는데. '결과보다 과정'이라더니, 교과서가 맞았다. 역시 교과서.




 그렇다고 드라마틱하게 확 바뀌진 않았지만, 과정의 희열을 조금씩 느껴갔다.


 뭣도 없는 상태에서 연출과 작가라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서치하고 머리 싸매다가 기똥찬 설계도를 그려냈을 때의 희열. 현장 답사에서, 설계도에 그린 것보다 더 좋은 걸 발견했을 때의 희열. 설계도를 현실로 만들려고 개떡같이 얘기해도, 스태프들이 찰떡같이 알아들을 때의 희열. 게다가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해 줄 때의 희열. 출연자들에게 개떡같이 인터뷰하는데도, 찰떡같은 대답이 나왔을 때의 희열. 대본도 없는데, 출연자들이 설계도대로 움직일 때의 희열. 설계도에 없는 의외의 행동이 더 좋을 때의 희열. 그 행동이 세팅된 카메라에 잡혔을 때의 희열. 아니면 촬영 감독의 동물적 감각으로 잡아냈을 때의 희열. 음향 감독이 주옥같은 멘트를 녹음했을 때의 희열. 조명 감독이 생각도 못한 분위기를 만들었을 때의 희열. 밤새워 촬영본을 뒤지다, 거치 카메라에서 아무도 몰랐던 대박 장면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 중구난방 에피소드들이 하나의 스토리로 체계가 잡혀나갈 때의 희열. 구성과 컷을 바꿨는데, 원래보다 훨씬 좋을 때의 희열. 종편 감독의 CG와 색보정이 죽은 영상을 살려줬을 때의 희열. 음악 감독이 깔아놓은 음악과 효과음이 영상에 집중시켜 줄 때의 희열. 등등등. 이런 것들이 리얼리티 물에서 느꼈던 과정의 희열이었다.


 물론 난 내향적이라 약간의 애로사항은 있었다. 예를 들면, 보통 다른 리얼리티 물에서는 전체 스태프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한번 설명으로 끝낸다.

 반면, 나는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면 위축되기 문에, 스태프를 한분, 한분 찾아갔다. 연출, 작가, 촬영, 조명, 음향, 거치, 드론, 미술, 등등등. 보통 열 번 이상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그리고 출연자에게 설명을 할 때도, 권위와 위신이 없기 때문에 메인 작가님에게 대신 부탁했다. 하지만 모두, 그저 애로사항일 뿐, 과정에서 느꼈던 희열에 희석됐다.


권위 없는 모습


  난 행운아다. 땜빵으로 들어갔던, 첫 메인 연출작에서 너무 과분한 사람들을 만나버렸다. 그들로 인해 괴감에서 탈출했고, 마지막까지도 행복했다. 8부작이 모두 하루에 연속편성돼서 좀 빡쎄긴 했지만, 계약된 날까지 8편의 마스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난 다음날 오전,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오후에, 도피 여행을 함께했던 여친과

결혼을 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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