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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Dec 10. 2023

정직원 생각 없으세요?

탈모가 왔다


 살인적인 리얼리티 물 제작 스케줄에도 버텨주던 내 머리에, 탈모가 왔다.




 온리 정규직만을 노렸던 난, 지난날들을 돌이켜보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2년을 버틴 곳이 한 곳도 없었다. 섭씨 70도까지 올랐다가 다음날 차가워져 버리는 핫팩과 같았다. 아니, 잠깐 내뿜다 사그라지는 불꽃놀이 분수탄과 같았다.


 이럴 거면 계약직도 넣자. 계약기간도 못 지킬 수 있다. 잘하면 무기계약직이나 정규직 될 수도 있잖아. 마침 A사에서 계약직 경력 PD를 구했고, 지원했고, 됐다. 익숙한 상암이라 걱정도 덜 됐다.


 당시, 그곳엔 네이버 <V LIVE> 같은 아이돌 플랫폼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플랫폼에 채워 넣을 '신규 생방송 아이돌 콘텐츠'들이 필요했고, 난 그걸 위해 뽑혔다. 입사 첫날, 부서 팀장은 이런 사실들을 내게 알려주며 덧붙였다.


 "기존 콘텐츠가 있긴 한데... 효과가 미미합니다. 오래 제작하셨던 영 씨의 눈으로 문제점을 파악해 주세요."

 모니터링 후, 보고서를 올렸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모든 게 잘못된 것 같다.               




 부서 내 제작팀은, 나까지 PD 2명, 조연출 2명. 총 4명이었다. 이 인력으로 제작이 되나? 의구심이 풀린 건 스튜디오 생방에서였다.


 생방 당일 스튜디오에는, 부서의 여직원 대여섯 분이 모두 내려와서 현장 진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조연출과 함께 아이돌이 할 게임 소품들을 챙기거나, 재밌는 상황에서 '깔깔 마녀'처럼 웃으며 분위기를 살렸다. 그리고 출연자나 촬영 스태프들에게 직접 디렉션을 줬다. 그렇다. 그녀들은 PD이자 작가였다.


 평소에는 본인들 기존 업무 외로, 출연자 섭외는 물론, 삼삼오오 모여 앉아 게임 기획까지 했는데, 그걸 프리랜서 작가가 대본으로 정리했다. 여직원들은 '브레인'이었다. 그녀들은 본인들의 시간을 빼가며 만드는 기존 콘텐츠에 엄청난 애착과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콘텐츠에 대한 문제점 보고서를 올렸고, 그녀들의 역린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


 그동안 제작팀은 '브레인'이 구상한 걸 그대로 만들기만 하면 되는 팀이었지만, 이젠 이곳에 그녀들이 했던 신규 콘텐츠 기획을 하라고, 날 박아놨다. 그곳은 외딴섬이었다. 함께할 제작팀의 인력들은 있으나, 없었다. 모두 기가 죽어 있었고, 의욕도 없었다. 그렇게 1도 원치 않았던, 여직원들과 나와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아니다. 그건 '린치'였다.




 "저희 이 플랫폼 어떻게든 잘돼야 해요."

 "제작을 오래 하셨다니, 굉장히 기대가 큽니다."

 "실패는 안 돼요. 신규 콘텐츠는 무조건 성공해야 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여직원이, 아직 적응도 안 된 내게 이런 말들을 던졌다. '무조건 성공'이라니... 부담감에 짓눌려 혼란한 내게, 그녀들은 본인들이 생각한 아이디어라며 '아이돌 일인칭 시점 데이트 물'을 얘기했다. 눈칫밥 경력이 있었던 난,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난 이걸 만들어야 하는구나. 실패 없는 무조건 성공으로...'


 성공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느 멋진 날>과 <피크닉 라이브 소풍>을 함께 했던 메인 작가님을 섭외한 것이었다. 대본을 부탁했다. 그리고 <피크닉 라이브 소풍>에서 만났던 <무한도전> 외부 촬영감독님을 섭외했다. 촬영감독님은 한 번의 촬영을 위해 헬멧까지 제작해 오셨다.


 실패 없는 성공을 해야 하지만, 기존과 다르게 생방 일엔 아무도 지원 나오지 않았다. 야외 생방이고, 출연자가 한 명이라 그런가. 출연자와 촬영감독, 조연출과 나, 이렇게 네 명만이 1시간의 생방을 마쳤다. 동시접속자 수는 성공은 아니지만, 실패도 아니었다. 됐어. 그리고 다음 날이 됐다.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모두의 얼굴이 굳어있다. 왜지.


실시간 댓글 반응도 나쁘지 않았는데.


 "동시접속자 수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말을 시작으로 폭격이 시작됐다. 우선 초 단위 폭격이 시작됐다. '몇 분 몇 초, 화면 노이즈 생김', '몇 분 몇 초, 오디오 끊김'. 한 사람이 생방을 저렇게 디테일하게 모니터링할 수는 없다. 여직원들이 각자 분량을 정해 모니터링한 후, 합친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도 지원 나오지 않았구나.


  그 후엔 대안 없는 감상평 폭격이 이어졌다. '아이템이 식상하다.', '주변이 시끄럽다.' 생방 전, 대본을 미리 공유했음에도 아무 말이 없다가, 식상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생방 전, 촬영 장소가 야외임을 미리 공유했음에도 아무 말이 없다가, 시끄럽다는 얘기가 나왔다.


 한 시간 동안 대여섯 명이 돌아가면서 폭격하거나 합세했고, 그걸 막아내는 건 어버버 대는 나 혼자였다. 회의 초반, 다른 남자 PD가 커버를 쳤다가 폭격을 맞은 후, 그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기존 콘텐츠의 생방 리뷰 회의는 이렇지 않았다. 마지막엔 대안 회의를 위해 메인 작가님을 소환하라고 했다.

 

 대안 회의 날, 작가님과 먼저 밖에서 만났다.

 "누나, 미안한데... 혹시 회의에서 무슨 말 들을 수 있는데... 이해 좀 해줘."

 "응? 왜? 무슨 일 있어?" 작가님이 놀라 물었다.

 "아니, 무슨 일은 없는데... 분위기가 좀..."




 "그 사람들 왜 이렇게 적대적이니? 말은 성공시켜야 한다면서 왜 그래? 네가 먼저 얘기 안 했으면 싸울뻔했어.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


 회의를 마치고 나온 작가님이 말했다. 그 엄마 같은 작가 누나가 화가 났다. 할 말이 없었다.

 "..."

 "내가 다 속상하다... 아휴... 우리 영택이 어떡하니."


 그 후, 미안함에 작가 누나에겐 다시 일을 부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 다른 작가님들과 함께해도, <피크닉 라이브 소풍>의 미친 조명을 쳤던 조명감독님을, 사정해서 반값으로 후려치고 모셔 와도, 그녀들은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회식 날이었다. 여직원분들 중 가장 직급 높으신 분이 내가 앉은 테이블에 와서 말했다.


 "영 씨는 PD 같지가 않아요~" 뭔 소리지?

 "네? 어떤 점이..."

 "PD님들 보통 그런 거 있잖아요. 앞에서 스태프 회의하거나, 출연자 대본 리딩 하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아... 전 대신 한 분씩 개인적으로 말씀드려요."

 "예예~"


 맥주 한 잔 들이켠, 자신감 넘치는 그녀가 말했다.     


 "혹시 다른 생각 있는 거 아니죠?" 또 뭔 소리지?

 "무슨 생각이요?"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아니, 영 씨는 회사에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고, 저희들에게 다가오려고 노력도 안 하시는 것 같아서요ㅎㅎ 정직원 생각 없으세요?"


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내 테이블을 떠났다.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잘했어. 할 만큼 했어'


 6개월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2년의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6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다. 탈모가 생겼고,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그리고 약을 삼키며 잡코리아를 뒤지고,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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