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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Dec 10. 2023

팀장이고 나발이고

이번 역은 서초, 서초역입니다.


 밤낮이 없거나, 바뀌거나 둘 중 하나였던 지난 13년을 뒤로하고, 이젠 강남의 회사원이 됐다. 나인 투 식스. 지하철에 앉아서 가려면, 평소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해야 한다는 팁도 알게 됐다. 나는 한 인문학 강연업체의 영상제작 팀장이 됐다.




 조금은 이른 스물넷에 방송일을 시작한 난, 2017년, 방송 경력 13년 차의 서른여섯 아저씨가 돼버렸다. 전 직장에서 도망친 난,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지만, 나이도 경력도 어중간히 많은 내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제 좀 부담스러운듯했다. 마지막 한 군데, 팀장을 뽑는다는 그곳에서 연락이 왔다. 매일 오가기엔 멀어서, 될 대로 되라며 면접을 봤다. 뭔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것저것 물어보던 한 젊은 여자가 있었다. 한번 스친 인연이지 뭐. 그런데, 붙었다.


 첫 출근을 하니, 제작팀에 그 여자가 있었다. 대리님이라고 했다. 대리가 왜 장 뽑는데 앉아있었지? 트렌드가 그런가. 의아한 와중에 대표실에서 나를 찾았다. 대표라는 사람이 말했다.     


 "전 지금, 우리 회사에서 제작팀이 가장 고민이고, 걱정입니다."

입사 첫날, 이게 뭔 소리래. 그가 말을 이었다.     


 "팀워크가 영 좋지 않아요. 그걸 좀 중점적으로 잡아줬으면 좋겠어요. 어느 정도 잡혔다고 판단되면 팀장으로 발령하겠습니다."


 응? 나 팀장 아닌가? 미션 컴플릿 해야 팀장 시켜준다고? 대표라는 사람은 갈수록 이상한 말들만 했다. 여자 대리는 이 회사에서 가장 오래 있었다며, 본인보다도 오래 있었다고 했다. 뭔 족보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 대리를 잘 잡으세요. 그 대리 때문에 지금 전임 팀장도 나가는 겁니다."


 잘 잡고 나발이고, 일단 나는 일반 회사를 너무 몰랐다. 퇴근 후, 한 명뿐인 친구를 호출했다. 전에 피드백 없었던 내 기획안을 디자인해 준 친구였다. 그리고 지금은 일반 회사의 디자인팀 팀장을 하고 있었다.


 "야, 팀장은 뭘 하는 거야?"

 "아휴, 쯧쯧"

그 친구는 팀장은 중간 관리자라고 했다. 세컨 PD 같은 건가? 친구가 말을 이었다.     


 "업무를 스케줄을 잘 짜서 나눠줘. 그리고 얘들 관리하고, 위에 보고만 잘하면 돼."

 "일은?"

 "아휴, 어쩌면 좋아. 그게 일이야. 인마."


 제작팀인데 제작을 안 해? 관리가 일이야? 꿀이네? 그러고 돈 받아도 되나? 촬영, 편집에 밤을 새우며, 후배들이 맡을 분량과 스케줄까지 짜주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회상에 젖은 내게 친구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일단 내일 가서 한 명씩 개인 면담을 해. 걔들 불만이 뭔지."




 "일이 너무 많아요. 지금 두 명이서 모든 강의를 다 치고 있다고요."


 카페에서 가진 개인 면담. 여자 대리가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제작팀 스케줄표를 펼쳐놨다. 그러면서 본인은 원래 CG 디자이너인데도 편집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케줄표를 봤다. 그리고 놀랐다.


 '와! 개 널널해!'


 그랬다. 리얼리티 편집에 시달려온 내게, 그 스케줄표는 일정이 듬성듬성한 민둥산과 같았다. 하지만 이분은 요주의 인물, 세심히 접근하자. 스케줄표 위에 조심스레 손을 놀리며 말했다.


 "혹시 사원이라는 그 남자분이랑, 이렇게 저렇게 조정하면 안 될까요?"

 "네에??? 혹시 팀장님도 편집 안 하실 생각이세요???"

 "??? 아, 그, 그게 아니고요."


 내가 뭐 건드렸구나. 그녀는 조정이 아니라 분담을 원했다. 편집할 사람이 없다고, 대표님과 독대까지 하면서 계속 충원 요청했는데, 회사는 뽑아달란 사람은 안 뽑고, 편집 못 한다는 전임 팀장을 뽑았다고 하소연했다. 친구야. 이 자식아. 중간 관리자는 일 안 해도 된다며. 큰 결례를 범할 뻔한 난, 제안했다.


 "저희 셋이 나눠서 하시죠. 제가 익숙해지면 빼 드릴게요."




 '팀워크가 안 좋긴, 겁나 좋구먼.'


 대리님의 히스테리는 일탈이었다. 그녀는 '베리 나이스' 했다. 사원이라는 태호도 착했다. 그리고 대표님의 팀워크 미션 컴플릿으로 정식 팀장이 됐다. 그래도 뭐, 달라진 건 없었다.

 일은 '베리 이지'였다. 리얼리티 물에서 30대의 카메라를 배치하던 내게, 강의 촬영 카메라 3대는 일도 아니었고, 트라이포드 뻗쳐놓고 찍으니 잠까지 솔솔 왔다. 편집도 매번 20~30개의 비디오 트랙을 쌓아놓다가, 3개 놓고 하니까 정말 맘먹으면 혼자서 한 달 치 일을 3일 안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빌런이 있었다.


 경영진 중, '타노스'같은 이사님이 한분 계셨다. 이분 덕에 사무실 분위기는 늘 개판이었다. 매일 누군가, 혹은 전체를 상대로 노발대발 갈궈댔다. 아픈 건가? 기존 직원들은 물론, 신입 직원들도 '뽑으면 나가고'를 반복해서, 석 달 동안 퇴사자가 20명에 육박했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대표님은 본인이 스카우트한 탓에 입을 닫았다. 진정,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는 슈퍼 빌런이었다. 슈퍼 빌런의 주요 타깃 중엔 나도 있었다.


 "프리랜서 출신들은 막 굴러먹다 와서, 싹 다 정신 개조를 시켜야 한다고!"




 하루는 태호가 오디오 케이블이 필요하다고 했다. 3만 2천 원짜리 케이블이었다. 대리님에게 물어보니 기안서 한 장 작성하면 된단다. 한 장짜리 띡 줘도 되나? 불길한데. 케이블 영업사원 마냥 이 케이블이 필요한 이유와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를, 절절히  장 작성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사님. 케이블 구매 건으로 기안서를 가져왔습니다."

 "네, 그게 왜 필요한데요?"

 "네, 케이블 노후 때문에 그런데, 이 기안서를 보시면."

"그러니까 그게 왜 필요하냐고요!"


 지병이 도졌는지, 갑자기 이사님의 발작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같은 층, 세 부서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당황했다.


 "어, 그게, 케이블 노후 때문에, 오디오가 잘"

 "제작팀은 저번에도 기안 가져오고, 또! 이거 물품 파악도 다 안 돼 있나 본데! 온 지 몇 달 됐어요, 어! 아직도 제대로!"


 아픈 게 맞았다. 그분은 그렇게 정신이 아픈 분이었다. 직원들은 콩 벌레 마냥 둥글게 몸을 말아서 각자의 파티션 밑에 숨었고, 노출된 건 비루한 내 육신뿐이었다. 10여 분의 푸닥거리가 끝나고, 난 얌전히 밖으로 나가 7대의 줄담배를 피웠다.


 자리에 돌아온 건 퇴근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하지만 대리님과 태호만이 남아, 내게 우물쭈물 말도 걸지 못하고 안쓰러운 눈길만을 보냈다. 그들을 지나 자리에 앉아, 지갑을 꺼내 태호에게 말했다.


 “태호야. 그 돈 내가 줄게, 그 엿 같은 케이블 좀 사 올래?”


태호와 단둘이 준비했던 스튜디오 녹화.


 관료제 팀장으로 윗사람의 인정을 받으며 잘살아 보려던 난, 그 후 봉인 해제됐다. 인정 따위! 기안 따위! 월 500만 원 벌다가 연봉 3,400만 원 중소기업에 온 경력 13년 차의 난, 30만 원 안쪽의 물건은 다 내 카드로 긁어버렸다(여보 미안해). 친구에게 배운 팀장의 스킬들은 깡그리 무시하고, 경영진을 제외한 전 직원을, 방송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했다.


 업무 시간이든 나발이든, 애들 데리고 볕 좋으면 산책 가고, 배고프면 편의점 가서 라면 때리고, 할 거 없으면 카페 가서 커피 빨고, 피규어 샵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명목은 모두 팀장 주재 개인 면담이나 아이디어 회의였다. 좋네! 팀장!


 슈퍼 빌런이라는 거대한 공통의 적이 있어 전 직원들이 똘똘 뭉친 탓도 크겠지만, 그냥 이 회사는 멤버가 좋았다. 케미가 있었다. 흡사 <어느 멋진 날> 같았다. 20대의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나이의 나와는 많이 달랐다. 착하고, 똑똑하고, 일 잘하고, 말 잘하는데, 열심히 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친구들과 함께, 일하든 뭘 하든 즐거웠다. <어느 멋진 날>에서처럼 즐거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모여서 출연자 여행 계획 며 신나 했던 것처럼, 이 친구들도 그랬다. 저마다 매출 높여보려고 고민하고, 옹기종기 모여서 머리를 짜내며,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했다. 다음날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매출을 확인했는데, 올랐으면 신나 했다. 안 그런 척했지만, 티가 났다.


 연출 팀과 작가 팀이 제주도든, 편집실이든, 서로 계속 얘기 주고받으며 의견 나눈 것처럼, 이 친구들도 그랬다. 부서나 직위 상관없이 먼저 다가와서 "팀장님, 이거 안 될까요? 저거 안 될까요?" 하는 게 예뻤다. 밤새 편집했어도, 그렇게 나눈 의견대로 했던 수정이 즐거웠던 것처럼, 그 친구들의 요청을 들어주는 게 즐거웠다.


 무엇보다 매출이 오르든 어쩌든, 회사도 뭐도 자기들 것이 아닌데, 그렇게 즐거워서 이거 저거 해보려고 열심이고, 조금이라도 생각대로 되면 행복해하는 그 모습이, 나와 달라서 다행이었다. 난 <어느 멋진 날>을 하기 전까진 '내 거'여야만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 친구들 나이 땐, 그냥 나 자신을 방송 기계라고 여기고, 20대, 30대의 그 길었던 과정에서 즐거움을 별로 느끼지 못했으니까. 이 친구들은 벌써부터 인생 행복하게 산다. 요즘 것들은 참 똑똑해.



        

 아이러니한 점은 그렇게 오래 일한 방송판에서보다, 이 회사에서 발언권과 영향력이 더 많았단 것이다. 모든 친구들이 두서없는 내 말을 귀담아들어 줬고, 함께 해줬다. 혹시 글을 보는 그때 그 애들이 "착각하지 마세요. 팀장님!" 외쳐도, 그건 그냥 내가 느낀 거니까.

 그리고 또 아이러니한 점은, 이 회사를 그만둔 지 5년이 되어가는데도, 지금까지 내게 연락 주는 건 이 친구들뿐이라는 거다. 24시간을 붙어있었고, 가족보다 더 정을 나눴던 방송판의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내게 연락지 않는다. 그냥 먼저 연락하면 될 일인데, 극내향형 인간에겐 쉽지 않다. 쉽지 않아. 현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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