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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Feb 15. 2024

모두를 기대시킬 방법

오프닝과 엔딩의 기술

'오프닝'의 기술


 '보통'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자주, '정석'인가 싶어질 정도로 대부분 영상에서, 씬의 첫 컷은 다음과 같이 롱 숏이 붙는다.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시작하는지 일단 보여주는 것이다.


힘 뺀 오프닝. (출처 : 슬램덩크 21권)

 하지만 처음부터 독자들을 끌어당겨야 할 때, <슬램덩크>는 다른 방법을 쓴다.


1. 첫 컷부터 바로 '인물'로 시작


인물로 시작하는, 힘준 오프닝. (출처 : 슬램덩크 1권, 22권)

1) 1번 지면은 <슬램덩크> 1권의 첫 씬이다. 1권이라 독자들은 이 만화에 대한 아무 정보가 없다. 이 대장정의 첫 컷은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딱지 놓고 있는 장면이다. 독자들은 궁금해진다. '딱지 맞는 불쌍한 운명의 남자는 누구지?' 독자들은 여자의 대사를 통해, 울부짖는 다음 컷의 남자가 '강백호'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세 번째 컷을 통해 '강백호'의 친구들로 추정되는 출연자들을 알게 되며, 이들이 교복 차림이라는 '단서'를 통해 학생이라는 사실까지 추측하게 된다. 이제 생기는 궁금증, '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어디지? 중학생인가? 고교생인가?' 바로 다음 컷에 답이 붙는다. 북산고 1학년 7반이라는 '공간'을 풀 샷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독자들은 알게 된다. '얘네들, 북산고 신입생이구나.' 또 대사에서 계속 등장하는 '농구부'라는 키워드로 관객을 추측하게 만든다. '농구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북산고에 농구부가 있나?'


2) 2번 지면 첫 컷은 강백호가 파김치가 된 모습, '정말 길었다'라는 관계자들의 리액션이다. 독자들은 강백호의 힘든 모습과 관계자들의 대사라는 단서를 통해, 강백호가 정말 길고 힘든 무언가를 끝까지 해냈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된다. 바로 다음 컷 풀 샷에 답이 붙는다. 강백호는 '점프슛 2만 개 특훈'을 해냈다.


2. 첫 컷부터 바로 '사물'로 시작


사물로 시작하는, 힘준 오프닝. (출처 : 슬램덩크 22권, 23권)

1) 1번 지면 첫 컷은, 풍전고 데이터 인서트가 붙었다. 이 컷을 보면 풍전고는 대부분 팀들을 많은 점수 차로 이겼다. 독자들은 이 컷을 보고 추측하게 된다. '풍전고 공격력이 강한 팀이네. 북산이 애 좀 먹겠는데?' 역시 다음 컷, 애먹는 북산고가 풀 샷에 붙어 답을 한다.


2) 2번 지면 첫 번째 컷과 두 번째 컷은, 교실과 시험지 인서트가 붙었다. 어마어마하게 못 본 시험지가 널려있고, '강백호'의 이름이 쓰여있다. 독자들은 이 컷을 보고 추측하게 된다. '강백호 엄청 못 봤네. 낙제 과목이 많겠는데? 몇 개지?' 바로 다음 컷 풀 샷에, 강백호의 낙제 과목은 7개라는 답이 붙는다. 그리고 위 그림에서는 생략됐지만, 독자들은 '낙제 과목이 4개 이상이면 전국대회 출전 불가'라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다시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강백호, 전국대회 출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슬램덩크>는 독자들을 끌어들여야 할 때, 롱 숏이 아닌 클로즈업이나 인서트로 첫 컷을 시작했다. 왜냐? 장소 풀 샷으로 첫 컷을 시작하면, 시청자는 '여기서 뭔가 일어나려나 보다.'란 생각만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인물의 클로즈업이나 사물의 인서트를 첫 컷으로 붙인다면? 시청자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은 뭐지? 이 물건은 뭐지? 여긴 어디지? 어떻게 이야기가 이어질까?'


 롱 샷 시작과 달리, 시청자는 궁금증을 갖고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부터는, 훨씬 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쉽다. 궁금해진 시청자는 첫 컷 이후, 이어지는 컷들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종합해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이제 몰입한 시청자들에게 궁금증에 대한 답을, 사건을 진행시키며 차근차근 붙여나가면 된다.


 오프닝의 임무는, 본격적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관심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시청자를 궁금하게 만들어야 하고, 추측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청자가 '추측'이라는 지적 활동을 하려면, 우리는 '단서'들을 제공해야 한다. '추측'이라는 건, '단서'가 부족해 생기는 활동이니, 오프닝에 모든 정보를 다 보여 줘선 안 된다. 그렇다면 오프닝에서 줘야 할 최소한의 정보는 무엇일까?


3. 오프닝에서 흘릴 '최소한의 정보'


산왕 분석. (출처 : 슬램덩크 25권)

1) 1번~2번 지면 스코어 컷까지, 해남과 산왕의 경기 장면이 붙는다. 독자들은 궁금증을 갖는다. '왜지? 왜 해남과 산왕이 벌써 붙지? 게다가 산왕이 해남을 이기고 있어?'


2) 2번 지면 스코어 컷 후, 비디오를 보고 있는 북산팀을 풀 샷으로 보여준다. 이 컷으로 독자들은 두 가지를 알게 된다. '출연자인 줄 알았던 해남과 산왕의 경기는 녹화 비디오고, 북산팀이 숙소에 모여 이걸 보고 있구나.' 눈여겨볼 것은 해남과 산왕의 녹화 경기가 오프닝 인서트로 쓰여, 관객에게 궁금증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산왕은 해남을 이길 정도의 강팀이라는 정보와 이를 숙소에서 북산팀이 보고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된 독자들은 또 궁금해진다. '이들은 이 비디오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3) 3번 지면, 풀 샷으로 조용한 멤버들을 보여줘, 독자들을 추측하게 만든다. '얘네들, 쫄았구나. 강백호나 서태웅은 아니더라도.'


 <슬램덩크>는 여기서 '북산팀이, 숙소에서, 산왕 대 해남 녹화 경기를 보고 있다.'란 정보를 던졌다. 정리하면     

누가? 북산팀 = 인물(주인공과 주변 인물)
어디서? 숙소 = 공간
무엇을? 녹화 경기 시청 = 행동     


 <슬램덩크>가 오프닝에 던진 최소한의 정보는 인물, 공간, 행동이다. 오프닝에 이 세 가지를 간단히 제시해 독자에게 궁금증을 던진 후, 본론으로 산왕 분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프닝 영상을 만들 때도, 인물, 공간, 행동을 간단히 붙여보자. <슬램덩크>가 그랬던 것처럼, 오프닝에선 모두 자세히 설명하지 말고 간단히 붙여보자. 이들이, 여기서, 뭔가를 하고 있구나. 이 정도만 붙이면, 나머지는 시청자들이 추측해 나갈 것이다.


 이때, 제대로 시청자를 궁금하게 해 추측하도록 만들고 싶다면, 인물, 공간, 행동 정보를 어우러지게 만들자. 첫 번째 예시, '힘 뺀 오프닝'에서처럼 풀 샷으로 공간 정보, 다음에 인물 정보. 따로따로 붙이는 것보다, 바로 위 '산왕 분석' 예시처럼 붙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위 '산왕 분석' 예시에서는, 인물들을 보다 보니 녹화 경기라는 정보를 얻게 되고, 이걸 누가 보는지 궁금해질 때, '북산팀이 본다'는 인물, 행동 정보를 또 얻게 되고, 자연스레 '숙소'라는 공간 정보까지 얻게 된다.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자연스럽게 정보들을 흘리자. '단서'들을 캐치하려고, 시청자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며, 동시에 분량까지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여행 프로그램이 있다고 치자. 첫 컷을 여행지 풍경으로 시작한다면, '이 아름다운 곳에서 뭘 하겠구나.'란 느낌만 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출연자인 할배들이 길을 잃어 헤매는 컷부터 시작한다면? '할배들이 길을 잃었네? 힘드시겠네, 어쩌지? 도대체 어디서 길을 잃으신 거지?'란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다음 컷에 '할배들이 길을 찾는 중인 유럽 풀 샷'을 붙인다면, 시청자는 자연스레 이곳이 '아름다운 유럽'이며, 동시에 '아름답지만 말 안 통하는 유럽'이란 느낌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시청자는 걱정 반, 기대 반의 상태가 된다. '할배들은 말 안 통하는 유럽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 여행을 계속하실까?' 이것이 시청자를 기대시킬 오프닝의 방법이다.



'엔딩'의 기술


 시리즈를 만들기 위해, 엔딩을 맺을 때 <슬램덩크>가 사용한 방법을 살펴보자.


기대감. (출처 : 슬램덩크 25권, 27권, 30권)

1) 1번 지면, 최강 산왕과 싸우지만, 정대만의 컨디션은 최상이다. '정대만이 뭔가 보여줄 것 같아!' 독자들을 한껏 기대시키는 정대만의 컷에서 끊었다.


2) 2번 지면, 산왕에게 지고 있지만, 강백호는 산왕을 쓰러뜨리겠다는 선언을 한다. '강백호가 뭔가 보여줄 것 같아!' 독자들을 한껏 기대시키는 강백호의 컷에서 끊었다.


3) 3번 지면, 등 부상으로 쓰러진 강백호는 다시 일어나 '농구를 좋아한다.'라고 고백한다. 걷지 못한 강백호의 부상을 보고 긴장했던 독자들은, 부활한 그를 보고 기대한다. '강백호, 최악의 상황에서도 뭔가 보여줄 것 같아!' 행동과 대사가 어우러져, 기대감과 동시에 감동까지 주는 강백호의 컷에서 끊었다.


두려움. (출처 : 슬램덩크 7권, 20권, 26권)

1) 1번 지면, 농구부를 부수러 온 철이는 강백호와 달리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다. '강백호는 저 대단한 철이를 어떻게 때려눕힐까?' 독자들을 두렵게 만드는 철이의 컷에서 끊었다.


2) 2번 지면, 능남이 대추격전을 펼치는 가운데, 정대만이 쓰러졌다. '정대만 없이 북산은 능남을 이길 수 있을까?' 독자들을 두렵게 만드는 정대만의 컷에서 끊었다.


3) 3번 지면, 정우성의 3점 슛으로 산왕이 역전했다. '정우성뿐 아니라 산왕의 모든 선수가 슈퍼 플레이를 펼치는데, 북산은 산왕을 이길 수 있을까?' 독자들을 두렵게 만드는 산왕의 역전 장면에서 끊었다.


 <슬램덩크>는 독자들이 기대감과 두려움을 갖는 타이밍에 엔딩을 맺었다. 어떨 때 기대감과 두려움을 가질까? 시청자는 '감정이입'해 지지하는 출연자가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기대감을 갖는다. 그리고 '갈등'을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두려움을 갖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긴다.'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므로, 어떻게 갈등을 해결할 것인지 애태우며 기다리게 된다. 출연자가 '갈등'을 해결하기 직전 끊는다. 이것이 이어질 다음 이야기에 시청자를 기대시킬 엔딩의 방법이다.



북산 엔딩


 그리고 <슬램덩크>는 그들이 불태웠던 단 한 가지 목표, '전국제패'를 마무리하는 특별한 엔딩 방법을 선보인다.


북산 엔딩. (출처 : 슬램덩크 31권)


 이 엔딩은 너무나 특별해서 전매특허, '북산 엔딩'이라고 불린다. 기존 이야기들이라면, 출연자(주인공)는 '갈등'을 이기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북산은 토너먼트를 차례로 승리해, '전국제패'’를 달성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슬램덩크>는 그러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그저 그런 스포츠 물이 아닌, '성장물'로서 긴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만약 이들이 '전국제패'를 이룬다면, 인생의 목표는 달성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래서 <슬램덩크>는 산왕전을 통한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목표를 남겨뒀다. 우리는 목표를 향한 그들의 열정을 봤기에,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고 '전국제패'라는 목표를 향해 달릴 것을 안다. <슬램덩크>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북산 엔딩'으로, 작가는 독자들에게, 앞으로도 계속될 이들의 '영광의 시대'를 상상할 수 있게 해 줬다. 실패에도 계속 성장하는 인생, 청춘이란 그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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