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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택 Feb 15. 2024

소리를 쓰는 방법

오디오와 사운드의 기술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다. 만화책을 보며 수없이 머릿속에 그렸던 '산왕전', 그 '후반전 마지막 1분'을 보면서 '그래, 이거지!'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역시 음악을 넣지 않았어. 생각대로야...'


 내 상상 속에서도 '후반전 마지막 1분'에 음악은 없었다. 더 당기면 끊어질 고무줄처럼, 리듬만으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 컷들 사이에, 음악이 자리할 곳은 없었다. 그래서 텍스트북은 만화책이지만, 작가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혼자만의 생각에, 용기 내서 영상 제작 중 소리의 쓰임에 관해서도 얘기해보려 한다.



빠른 편집


 편집을 계속하며 느낀 것이 있다. 사람은 오디오에 민감하다. 컷이 튀는 것보다, 오디오가 튀는 것을 못 견딜 정도로 오디오에 민감하다. 오디오가 매끄럽게 연결돼 있으면, 컷이 좀 튀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고, 다음 컷의 오디오가 먼저 들리면, 컷이 튀지 않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영상을 매끈하게 다듬을 때, 오디오를 비디오보다 2~3 프레임 선행시키는 스플릿 편집을 쓰기도 한다. 오디오의 이런 위력에 기대, 편집 빨리하는 방법을 말하자면


STEP 1) 구성을 잡고, 오디오 편집을 한다. 이때, 비디오는 컷이 튀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말자. 오디오가 매끄럽게 이어져, 말이 되는 것에만 집중해 편집한다.
STEP 2) 튀는 컷을, 다른 카메라 컷으로 바꾸거나, 컷 사이즈를 조정하거나, 인서트 컷을 넣는 식으로 정리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볼만해진다.
STEP 3) 인트로, 아웃트로, 인터뷰, 자료 구다리 등을 끼워 넣는다. 그러면 좀 더 구성물 같아진다.
STEP 4) 마지막으로 음악을 깔면, 영상이 매끄러워진다.


 이것이 빠르게 영상 한 편 뚝딱 만드는 방법이다. 이 정도만 해도 매끄러운, 초보티를 벗어난 영상을 만들 수 있다. 재미는 보장 못하지만.



음악 편집


 항생제는 나쁜 균을 죽인다. 대신 좋은 균도 죽인다. 영상에서 음악도 그렇다.


음악 사용의 장점

     

 1. 음악은 리듬과 멜로디로 분위기를 만드는 하나의 작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그 분위기를 빌려 쓸 수 있다. 방법은 그저 영상에 음악을 까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빌리고 싶을 때, 영화 <할로윈>의 메인 테마 음악을 깔면,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영상이 된다. 나무늘보 촬영본에 이 음악을 깔면 당장 나무늘보에게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분위기를 낸다. 그렇게 효과가 강하다.


 2. 음악은 리듬이 있다. 빠른 리듬이나 느린 리듬을 만들고 싶을 때, 원하는 리듬의 음악을 깔고, 그 음악 리듬에 맞춰 컷을 붙여나가자. 드럼이나 베이스 비트에 맞 컷을 쪼개고, 드럼이나 베이스를 강하게 칠 때는 클로즈업, 약하게 칠 때는 와이드 샷을 붙인다. 그러면 영상 리듬은 음악 리듬처럼 만들어진다. 영상만으로 어떻게 리듬을 만들어야 할지 판단이 안 설 때, 만든 영상에서 리듬이 느껴지지 않을 때 사용하면 효과가 좋다.


 3. 음악은 흐름이 있다. 그 자체로 흐르기 때문에, 튀는 컷들마저 매끄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컷뿐만 아니라, 각 씬과 시퀀스도 튀지 않게 연결하며, 조화롭게 한 편의 영상으로 만든다.     



음악 사용의 단점


 1. 시청자는 영상 자체의 리듬에 빠질 때, 영상에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영상 리듬과 어긋나거나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 깔린다면? 그 즉시, 음악은 영상 리듬과 분위기를 죽인다. 음악 자체가 한 편의 완성된 작품이라, 그 리듬과 분위기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잘못 쓰면 그때부터 리듬의 주도권은 음악으로 넘어가, 시청자의 영상 집중을 방해한다. 하지만 영상 리듬과 음악 리듬이 어울릴 때, 그 시너지는 대단해서 안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2. 이를 피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영화처럼, 편집본에 맞춰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가난한 우리에겐 현실성이 없다. 그나마 현실성 있는 방법은     


STEP 1)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 깐다.
STEP 2) 편집 중간마다 음악을 끄고, 영상 리듬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확인한다.
STEP 3) 음악감독에게 후반작업을 맡길 경우, 편집 시 썼던 가이드 음악을 참고용으로 전달한다.


 3. 음악은 흐름도 강력해서, 큰 '충돌'이 나도록 의도했던 부분까지 매끄럽게 연결해 버린다. 의도하거나 영상 자체의 리듬을 살려야 할 부분은 음악 사용을 자제하자. 대신 영상 리듬을 만들 땐 영상 자체에서의 효과음이 도움 된다. 예를 들어, '쾅'하고 문 닫는 소리, '툭'하고 책 덮는 소리, '큭'하고 헛기침하는 소리 등은 리듬의 강세로 작용하고, 컷을 바꿀 때 이런 소리를 넣으면 컷도 튀어 보이지 않는다.


 음악은 리듬과 분위기를 만들기 쉽고, 거칠게 붙었던 컷을 매끄럽게 만들기도 쉬워서, 한번 쓰기 시작하면 헤어 나오기가 힘들다. 나중에 영상만으로 리듬을 만들려고 해도, 훈련되지 않아서 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시 음악에 손을 댄다. 음악만이 나라에서 허용한 마약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장점이 있으니 항생제 쪽이 가깝겠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마약도, 항생제도 쓰지 않고, 순도 99%의 영상 리듬만으로 '후반전 마지막 1분'에 우리를 몰입시켰다.



대사 편집


 영상 편집을 한다면, 우리 머릿속에 확실히 개념을 분리해 놓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비디오 따로, 오디오 따로'다. 비디오와 오디오는 언제라도 따로따로 내 맘대로 자를 수 있고, 독립적으로 움직여 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영상 제작의 기본 마인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다음 <슬램덩크>의 장면을 보자.


강백호에게 보이지 않는 것. (출처 : 슬램덩크 26권, 27권)

 1) 1번 지면, 강백호가 신현필의 등 뒤에서 대사 한다.     


 2) 2번 지면, 강백호가 관객들을 향해 대사 한다.     


 이 두 장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강백호의 입이 보이지 않는다. 입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어떤 말을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말은 3번 지면처럼 다른 어떤 대사를 붙여도 되고, 아예 삭제해도 된다는 것이다.

 

 앞서, '비디오 따로, 오디오 따로'라고 했다. 1번~2번 지면처럼 강백호가 실제 저런 대사를 했다 하더라도,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강백호의 대사를 찾아, 입이 보이지 않는 강백호에게 붙여도 된다.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재미를 강화해 시청자를 몰입시킬 목적으로 수정한다. 그것이 리얼리티다. 리얼리티 편집에선 비디오와 오디오의 싱크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이 유연한 사고가, 실제로는 없었던 명장면을 창조한다.


그들이 북산에 더해준 것. (출처 : 슬램덩크 30권)

 <슬램덩크> 30권에서는 안 선생님이 각 멤버의 재능을 차근차근 짚어주며 용기를 불어넣는 명장면이 있다. 하지만 안 선생님은 사실 수다쟁이라고 치자. 위 명대사들 사이에 구구절절 다른 말들이 섞여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명장면을 만들려면, 명대사만 남겨야 한다.


 1) 1번 지면 첫 컷. 안 선생님의 입이 보이는 풀 샷에서 대사를 시작한다. 시청자에게 안 선생님이 멤버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정보를 주자.


 2) 다음 컷부터 안 선생님의 구구절절한 대사들은 다 걷어내고, 각 멤버에 대한 명대사만을 남기자. 멤버들에게 말한 순서를 바꿔도 좋다. 각 대사의 시작 타이밍을 조정해도 좋다. <슬램덩크>는 안 선생님의 대사 후 관계자들의 리액션을 붙여, 다음 대사의 시작 타이밍을 늦췄다. 시청자에게 안 선생님의 말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오디오는 매끄럽게 정리됐지만, 이제 튀는 컷들이 있을 것이다. 이건, 각 멤버와 관계자의 리액션 컷을 끼워 넣어 깔끔하게 정리하자.


 3) 이제 3번 지면 안 선생님의 입이 보이는 바스트 샷 '이것이 북산이야.'라는 명대사를 붙여 마무리한다. 명장면이 탄생했다. 이때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명장면이 된 이유는 명대사 탓도 있지만, 그보다 명대사에 반응하는 멤버들의 리액션 덕분이란 것이다. 생각해 보자. 멤버들의 리액션 컷 없이, 끝까지 안 선생님의 대사 컷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작전타임이 시청자의 기억에 남았을까? 언제나 대사보다 행동이 강렬하다. 3번 지면 마지막 컷에선, 한 명씩 등장했던 멤버 모두를 한 컷에 담아, 서로를 바라보는 행동으로 마무리했다. 이 컷은 대사 없이 강렬히 외친다, '우리는 북산이다!'



내레이션 & 보이스오버


 처음 방송일을 시작한 2005년에 들었던 지침은 '방송은 중학교 2학년 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라.'였다. 그래서 과정을 다 보여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2024년이다. 그때의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은 30대가 됐고, 지금의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은 날 때부터 영상을 접했다. 모두가 똑똑해졌고, 예전 방송국의 지침은 이들을 무시하는 과도한 친절이 됐다. 그리고 이런 과도한 친절의 수단으로 남용되는 것이 대사, 내레이션, 보이스오버 같은 오디오 기술이다.


잘못된 쓰임의 예


두 번 말한다. (출처 : 슬램덩크 25권)

 위 그림은 전광판만 봐도, 한 골씩 넣어 동점이 된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옆 똑같은 내용의 내레이션이 붙어있다. '굳이' 이래야 할까? 영상을 대사, 내레이션, 보이스오버 같은 오디오로 설명하는 것은 두 번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자막까지 더하면 세 번 말하게 된다. 행여 강조의 의미라도 세 번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다.

 '유머는 설명하는 순간 재미 없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영상에서도 통해, 과도한 설명은 똑똑해진 시청자의 추측을 멈추고 몰입도 멈춰, 영상을 재미없게 만든다. 대사, 내레이션, 보이스오버처럼 말을 통한 기술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설명하려 할 때다. 영상만 있는 게 왠지 허전해서 이 기술들로 오디오를 채워 넣고 싶다면, 다시 한번 영상을 보자. 영상에서 다 보여줬는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면 넣지 말자. 과유불급이다.



올바른 쓰임의 예


상황 정리 내레이션. (출처 : 슬램덩크 27권, 31권)

 사건 시작 전과 종료 후, 정리가 필요할 때 내레이션은 효과적으로 쓰인다. 1번~2번 지면에서 내레이션과 함께 상황 정리에 사용된 분량은 단 두 페이지다. 이러한 효과로 영상에서 하이라이트나 프롤로그, 에필로그에 자주 쓰인다.


말할 수 없는 출연자의 보이스오버. (출처 : 슬램덩크 22권, 30권)

 영상에서는 행동이 아닌 말로 설명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반대로, 출연자가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선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는 뜻도 된다. 1번 지면에선, 등 부상에 쓰러진 강백호의 생각을 보이스오버로 드러내 시청자를 안타깝게 한다. 2번 지면에선, 세상을 떠난 안 선생님의 제자 조재중 군의 편지를 보이스오버로 드러내 안 선생님의 충격과 절망을 시청자에게 전달한다.


오디오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될 땐, 영상은 라디오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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