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거칠게 몸을 뒤척이고

당신이 음울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면

by 이정식

근 몇 년 사이, 계절의 변화가 약간 거칠다는 느낌이 든다. 아직 감정이 차오르지 않았는데, 사랑을 서둘러 시작한 느낌이랄까. 계절이 급하게 뒤척일 때마다, 감정 역시 흔들릴 때가 있다. 감정의 파문, 일렁임, 요란스러움. 그건 깊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특히나 심했는데, 한순간 푸른 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처럼 그건 예상할 수도, 준비할 수도, 또 안다고 해서 대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 내가 했던 일은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문장들을 필사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파도에 파묻힌 듯, 급격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깊은 강 한가운데로 들어간 것처럼 고요해지곤 했다. 샤워를 마친 후, 핸드폰 전원을 켜고 Sigur Ros의 앨범 <Valtari>에 수록된 "Dauðalogn", "Fjögur Píanó "를 들으면, 모든 세계가 지워지고, 오직 음악을 듣는 나만이 이 아득한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 같아 쓸쓸해진다. 그러나, 그 쓸쓸함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영원처럼 고요하여 도리어 편안해지기도 한다.



KakaoTalk_Photo_2018-10-03-17-44-52.jpeg 창 밖의 빛이 안으로 들어와 어둠을 몰아내줄 수 있다면.


쓸쓸함은 단연, 한강 작가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친숙한 감정이기도 하다. 그녀의 글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각자만의 아픔을 앓는다. 그러나 요란하지 않다. 도리어 너무나 적막하여, 그래서 내면 깊숙한 곳에 배어있는 것이어서, 아예 삶이어서, 그 인물들의 모습이 의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앓고 있다. 자신의 삶으로부터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스스로를 밀어내면서.


어떤 음울한 시간은, 고요한 우울의 강 아래로 깊숙이 빠져들어감으로써 오히려 삶의 뭍으로 헤엄쳐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내 방을 시규어 로스의 음악으로 가득 채운 뒤, 미친 듯 한강의 글을 필사할 수 있어서, 내일을 살 수 있고, 거리의 행인들과 가끔 눈을 마주칠 수 있으며, 만원 지하철의 인파 속으로 주저없이 뛰어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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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지하철에서 마주 앉은 사람의 얼굴을 본다. 핸드폰에 얼굴을 파묻으며 열중하는 사람도 있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무 행동 없이 창밖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 응시가 너무나 깊고 단단해, 어떤 것도 그 응시를 쉽게 무너뜨리지 못할 것처럼. 그럴 땐, 나는 그 단단함의 은밀한 이면이 궁금해진다. 어떤 아픔을 그는 앓아왔는지.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얼마나 밀어내 왔는지. 동시에, 삶과 자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엇을, 그리고 얼마만큼 움켜쥐려고 힘을 주었을지.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 꽤 쌀쌀하다. 약간 손이 시려, 잠깐 주머니 속으로 피하기도 한다. 당신, 세상이 쌀쌀하게 느껴진다면, 조용히 나 자신을 삶으로부터 밀어내 오고 있었다면, 잠깐 당신의 우울 아래로 좀 더 깊숙이 내려가시라. 마음껏 침잠하시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바닥에 닿을 것이다. 바닥을 디디고 올라가든지, 혹은 바닥을 뚫고 뭍으로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당신은 그 시간을 통과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원할 듯 잠잠한 시간도 계절이 뒤척이는 것처럼, 분명 일렁일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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