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선물을 주고받은 적이 있나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하겠죠. 생일, 기념일, 입학식, 졸업식, 취업, 승진 등 많은 경우에 선물을 주고받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과연 우리는 선물을 제대로 주고받았던 것일까요? 여기서 선물과 뇌물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선물은 어떤 대가도 없이 주고받는 것이라면, 뇌물은 대가를 전제하고 주고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뇌물과 선물은 정의처럼 그렇게 분명히 구별되는 것일까요? 다음 사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친구가 승진했을 때, A는 고급 정장을 살 수 있는 100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주었다고 가정하죠. 소중한 친구였기 때문에, A는 선물을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하기만 했을 겁니다. 얼마 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A에게 일어났죠. A도 친구와 마찬가지로 승진하게 되었던 것이죠. 소식을 들은 친구는 전화로 축하의 뜻을 전하며 만나자고 했습니다. 친구는 조그만 봉투를 건네주며 식사를 사주었습니다. 친구와 헤어진 뒤 봉투를 열어보고는 A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봉투 안에는 5만 원 상당의 도서 상품권 한 장이 달랑 들어 있었기 때문이죠. 불현듯 A는 불쾌감이 들었고, 얼마 전 자신이 승진 선물로 건네준 상품권이 뇌리를 스치게 됩니다. 상품권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받은 도서 상품권과 비교하는 순간, A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과거에 주었던 선물이 사실은 선물이 아니라, 일종의 뇌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A는 대가를 바랐던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망을 드러내고 있죠. 방금 사례는 A에게만 해당하는 특이한 사례일까? 선물을 받고 나면 항상 그 선물의 액면가와 유사한 대응 선물을 고르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관례이지 않나요? 이것은 우리가 주고받는 대부분의 선물이 명목상으로만 선물일 뿐, 그 이면에는 뇌물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죠. 선물이나 뇌물과 관련된 철학자 Jacques Derrida의 논의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선물과 관련된 우리의 허위의식을 그 뿌리에서부터 파헤쳤습니다. 조금 복잡하지만, 선물에 대한 그의 논의를 음미해보죠.
선물이 주어지는 조건으로서의 이런 ‘망각’은 선물을 주는 쪽에서만 근본적인 것이 나이라, 선물을 받는 쪽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선물을 주는 주체에게 선물은 되갚아지거나 혹은 기억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희생의 기호,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 일반으로 남아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상징은 즉시 우리를 또 다른 상환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주어진 시간>
- Jacques Derrida -
특히 선물을 주기는 주지만, 선물을 주었다는 것을 망각해야만 한다는 그의 주장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됩니다. 분명 다음과 같은 반문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선물을 준 다음에 내가 선물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선물을 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건 매우 날카로운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질문은 타당한 것일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선물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죠. 그가 강조하고 있는 논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줍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죠. 사실 선물을 주고서 주었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으려 하는 우리의 의지만이 선물을 선물로서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대가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 다시 말해 선물을 선물로서 주겠다는 의지는 사실 타자와의 사랑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회복하겠다는 의지와 동일한 것이죠.
신혼의 어느 부부를 생각해보죠. 남편은 아침에 아내가 차려주는 정성스러운 식사를 ‘선물’로 받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식사를 차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바로 여기에 신혼부부가 갖는 설레는 행복의 비밀이 있다고 볼 수 있죠. 반대로 월급날이 되면 남편이 가져다준 월급봉투를 아내는 ‘선물’로 받게 되죠. 그녀는 자신이 해준 식사의 대가로 남편이 월급을 건넨 것을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새댁은 남편의 월급봉투를 받고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부부는 여전히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불행히도 대부분의 부부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아내의 식단이 좀 더 나아지고, 동시에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남편의 반찬투정도 심해지기 쉽죠. 월급을 받고 아내는 남편의 수고를 떠올리기보다는 오히려 그 돈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남편으로서 당연히 돈을 벌어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제 어쩌다 아내가 저녁에 늦게 들어와 저녁 식사라도 차려주지 않으면, 남편은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집에서 밥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식사를 차리는 것이 아내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이 사례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선물의 관계가 뇌물의 관계로 변질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죠. 사랑했던 두 남녀는 이미 하나의 교환 관계, Jacques Derrida가 표현한 “상징적인 것 일반”에 매몰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신혼부부의 설레는 사랑, 선물을 주고받았던 살가운 관계가 이제 분업 체계로 흡수되어 증발되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랑이 형식적인 상징으로 변한 것이죠. 남편은 밥을 먹었으니 돈을 벌어와야만 한다. 이제 그는 가장으로서 수행하는 자신의 노동이 가정 경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반대로 그녀는 아내로서 수행하는 가사 노동이 가정 경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죠. 신혼부부의 사랑을 유지시켰던 선물의 논리가, 마치 음식과 돈이 교환되는 식당에서처럼 뇌물의 논리로 변질되어버린 것이죠. 여기서는 사랑도 기대할 수 없고, 선물 또한 기대할 수 없죠. 이제 채권과 채무의 관계, 즉 뇌물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
Jacques Derrida는 이성 중심주의를 치열하게 비판했던 해체주의 철학자입니다. 그렇지만 말년의 그는 기존 사유를 가차 없이 해체하기보다는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우리의 삶에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가 이성을 포함한 모든 중심을 해체한 이유는 인간 모두에게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중심을 부여하기 위함이었죠. "중심은 하나가 아니라 인감의 수만큼 존재한다." 이제 모든 인간은 고유한 삶의 주체가 된 것이죠. 말년의 그는 삶의 주체가 된 우리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조언합니다. 특히 그의 조언은 ‘선물이 가진 역설’과 관련되어 빛을 발하죠.
선물이 역설적인 것은, 그것이 교환이 아닌 교환, 즉 ‘불가능한 교환’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점은, 그가 유언처럼 남긴 출고가 지금까지 모든 현명한 사람들이 남간 말을 번복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일체의 대가 없이 네가 가진 것을 주어야만 한다.” “수확의 기대 없이 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맞습니다! 그는 우리가 너무나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지혜로운 자들의 가르침을 새롭게 되새긴 것이죠. 그렇지만 그는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망각하고, 망각해야만 하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가르쳐주었죠. 이제 우리는 뇌물이 아닌 선물을 주는 지혜를 고민해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 설레는 사랑과 진정한 행복의 조그마한 가능성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