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로서 살아가는 자긍심
모든 대립과 갈등에서 원론적으로 제기되는 가치가 바로 ‘사랑’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사랑은 지금 부르주아 커플이나 부부에게 포획되어 협소해진 사랑이란 개념과는 구분해야 한다. 그러니 사실 사랑은 유대, 연대, 혹은 우정이란 개념처럼 공적으로 확장되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공적인 가치가 있었던 사랑이란 개념을 사적인 감정 차원으로 감금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힘이었다. 소수가 지배하는 체제의 논리에 따르면 피지배자의 공적인 유대나 연대처럼 무서운 것도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대립의 종결 원칙도 사랑이고, 갈등의 종결 원칙도 사랑이고, 경쟁의 종결 원칙도 사랑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참혹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공자가 인을 제안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공자는 귀족층들의 대립만 해소되면 혼란은 끝낼 수 있다고 낙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일반 민중 혹은 여자들의 존재는 별로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인人이라고 불리는 지배층들 상호 간의 사랑만 회복할 수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바람에 풀잎이 눕듯이” 저절로 지배층을 존경하고 따르게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묵자는 공자가 제안했던 사랑이 차별적이라고 폭로하면서, 사랑은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사상가였다. 그래서 묵자의 철학은 항상 ‘겸애’라는 슬로건으로 기억된다.
묵자의 겸애는 민중의 정치적 위상이 그만큼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묵자는 겸애를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도리어 강력한 군주와 강력한 종교를 요구하는 무리수를 쓰게 된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겸애를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하늘의 뜻, ‘천지 天志’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묵자의 철학을 기독교와 비교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묵자가 제안한 하늘의 뜻은 겸애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을 뿐 기독교처럼 절대적인 목정으로 간주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묵자는 겸애를 실천하기 위한 다른 구체적인 방법도 모색했던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비공 非攻’, 즉 묵자의 반전사상이다. 묵자의 반전사상은 단순히 구호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공격 혹은 전쟁을 감행했던 국가에 맞서 단호히 싸웠다. 공격을 당한 국가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그들을 지켜주는 형식으로 말이다. ≪묵자≫ 에 들어 있는 <비성문備城門> 편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편 제목 그대로 강자에 맞서 약자가 성문을 잘 수비하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실제로 묵자 한두 명이 들어가 공격에 앞서 성곽을 미리 정비하면 수십 배의 적군을 거뜬히 물리쳤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묵자들은 당시 가장 탁월한 엔지니어이기도 했다. 니담 Joseph Needham (1900~1995)이 총괄 편집했던 기념비적 시리즈물 ≪중국의 과학과 문명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에서도 중국 고대 과학 사상의 대부분이 ≪묵자≫ 분석에 할애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묵자들이 고립무원의 신세로 성곽에 갇혀 있는 약자를 구하러 갔던 이유는 무엇일까? 약자를 도와줌으로써 그에게 겸애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묵자들은 위기에서 벗어난 약자들도 겸애의 이념을 가슴에 품고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약소국과 군주는 자신들을 도우려 달려온 묵자들에게 얼마나 감동했을까? 고마움에 근사한 침소와 음식을 주어도 묵자들은 그걸 향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포위된 성안으로 들어온 이유는 약자에 대한 사랑 때문이지 좋은 침소와 음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마구간과 같은 비천한 곳에서 침소를 마련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음식만을 먹었던 것이다.
≪장자≫ <천하 天下> 편은 묵자의 헌신적인 삶을 술회했던 적이 있다. “묵자는 자신의 도道에 대해 말했다. “옛날 우禹임금은 홍수를 막고자 양자강과 황하의 물줄기를 터놓아서 사방 야만족의 땅과 구주九州를 소통시켰다. 큰 강이 300이고 지류는 3,000이나 되었고, 작은 물 흐름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고 한다. 우임금은 몸소 삼태기와 보습을 가지고 천하의 물줄기를 서로 이어놓고 갈라놓았다. 그의 장딴지는 마르고 정강이에는 터럭이 없었으며 그는 폭우에 목욕하고 강풍으로 머리를 빗었다. 이런 초인적인 노력으로 그는 수많은 거주 지역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禹는 큰 성인이면서도, 천하를 위해 몸을 수고롭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도다!” 뒤의 묵자들도 대부분 천한 짐승 가죽과 베옷을 입고, 나막신과 짚신을 신고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스스로의 고생을 철칙으로 삼고서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임금의 도가 아니니 묵자 墨者라 말할 수 없다.’”
“묵자라 말할 수 없다 不足謂墨!” 이 구절에서 우리는 묵자들의 자긍심을 읽어낼 수 있다. 누구나 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 않겠다는 어떤 숭고한 의지마저 느껴진다. 이런 강한 자긍심은 묵자학파의 창시자 묵적墨翟에 대한 그들의 존경에서도 드러난다.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 약 500여 년 지속된 묵자학파의 사상은 ≪묵자≫에 기록되어 있는데, 묵자墨者들은 자신의 창시자 묵자 墨子 묵적을 매우 특이하게 인용하고 있다. ≪논어≫에서 공자의 말을 인용할 때, '자왈 子曰'을 사용한다. "선생님께서 말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묵자≫에서는 '자묵자왈 子墨子日'이라는 말로 묵자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보통 연구자들은 "묵선생님께서는 말했다"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럴 경우 '묵자왈' 앞에 붙어 있는 '자子'라는 글자는 해석되지 않게 된다. 차라리 "(유일한) 선생이신 묵선생님께서는 말했다"는 강한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겸애라는 숭고한 이념을 실천했던 자긍심 강했던 묵자들은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춘추전국시대 동안 대부분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관성 때문에 묵자들의 삶은 그만큼 더 비극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부국강병이란 당시 시대의 추세를 거스르는 삶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묵자가 지금 당장 돕고 있는 약소국도 언젠가 강대국이 되어 겸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영원한 강대국도 영원한 약소국도 없는 것이 바로 춘추전국시대의 양상이었기 때문이다. 묵자의 도움으로 국가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군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강력한 국가의 군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군주가 과거 묵자의 도움을 가슴에 새기고 겸애의 군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마침내 묵자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되었다. 한때 공격받았던 국가가 이제 공격하는 국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때 어쩔 수 없이 묵자는 과거 자신들이 도왔던 국가와 다시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비공, 즉 겸애의 정신이니까 말이다. 이러 식으로 묵자들은 춘추전국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다. 항상 강자에 맞서 약자와 함께했기에, 묵자들은 그들과 함께 강자와 싸웠고 죽어갔다. 비록 비극적이었지만 묵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춘추전국시대가 더 나았다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가 종식된 후 등장한 대제국에게 묵자들은 눈엣가시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통일 제국시대에 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 그것은 국가에 저항한다는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묵자가 춘추전국시대와 그 운명을 같이할 수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