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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안나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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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연 Nov 14. 2024

안나

16. 소년

헬로우, 당신 누구야?


낯선 음성이 들렸다. 기억에 없는 낯선 공간이었다. 안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낼 만큼의 에너지가 없었다.

 

눈동자를 굴릴 뿐 별다른 반응이 없자 낯선 목소리가 안나를 나무 박스에서 꺼냈다. 중학생쯤 돼 보이는 더벅머리 소년이었다. 얼굴이 여드름 하나,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했다.

 

와우, 당신 인형이야, 로봇이야, 사람이야?


소년이 안나의 얼굴을 손으로 만져보고 코를 안나의 가슴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고 가만히 뒤에서 안아보더니 안나의 뒤꿈치 안 작은 박스에 서려 있는 전원케이블을 찾아내 전기 콘센트에 꽂고 겨드랑이 밑에 있는 안나의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전기가 공급되고 팽창된 에너지가 곧바로 안나의 몸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안나는 엉거주춤 앉아있던 자세를 풀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나는 러브봇 안나입니다.

 

안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그게 자신이 할 일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너무 놀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소년의 몸에 가려있던 집 안의 벽과 천장이 모두 한눈에 보였다. 벽은 온통 콜라병 천지였다. 푸르고 투명한 빈 콜라병들이 온 벽을 덮고 있었다. 잘록한 허리를 가진 여자의 몸매를 형상화한 그 콜라병들은 하나하나가 성벽을 이루는 벽돌처럼 보이기도 하고, 똑바로 서서 그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방 벽에 콜라병 도배지를 바른 것 같았다. 천정에는 투명한 빈 병, 내용물이 바닥에 닿은 병, 내용물이 반만 차 있는 병, 내용물이 가득 차 있는 병 등 온갖 종류의 콜라병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옆으로 누워있었다. 다시 보니 그것들은 저마다 폭탄을 싣고 비행하는 전투기처럼 천정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저런 벽지를 발랐을까?


안나는 스스로에게 묻다가 주저앉은 소년을 떠올리고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엉덩방아를 찧은 그대로 바닥에 앉아있었다. 안나는 소년과 자신이 엉거주춤 앉아있거나 서 있는 공간이 이상하게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안나는 일렁이는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자신은 러브봇이었다. 소년의 놀란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줘 자신을 안게 해야 하는, 또는 자신에게 안기게 해야 하는.


나? 나 두산, 박두산. 너는 뭐야? 누구야? 어디서 왔어?


아, 이런 중요한 존재론적 질문을 이렇게 급하게 한꺼번에 하는 사람은 처음 만납니다. 나는 러브봇 안나입니다.

 

안나는 최대한 재밌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가 어린 소년이어서 자신이 그렇게 판단하는 것 같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섹스 머신입니다. 남자 사람들이 섹스를 잘하도록 돕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섹스입니다.

 

섹스…?


안나는 소년의 가슴이 가파르게 벌렁거리고 온몸의 피가 아랫도리로 쏠리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안나는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소년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도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안나는 그가 서툴다는 것, 이런 종류의 섹스를 처음 해본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안나는 소년이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그의 몸 리듬에 자신의 리듬을 맞추고 마음을 모았다.

 

안나는 미친 듯이 몰아치다 14년 동안 그의 몸 안에 쌓인 것을 모두 쏟아내고 잠잠해진 소년의 몸을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어줬다. 재지 않고 거침없이 다가온 그에게, 그리하여 순정하게 보이는 그에게 자신의 순정을 다하고 싶었다.


난 처음이야. 섹스도 처음이고, 이렇게 내 몸과 마음을 온전히 다 풀어놓은 것도 처음이야. 누군가에게 내 몸을 온전히 보인 것도 처음이고. 누군가를 안고 함께하는 것도 처음이고. 마음이 이렇게 고요하고 평안한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입으로 내 마음을 차분하게 표현해 보는 것도 처음이고.


안나는 그를 가슴에 안은 채 자신의 입술로 그의 입술을 보듬어주고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쓸어줬다. 그가 사랑스러우면서도 웬일인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모두가 처음 맨’이네요! 마음 나눌 친구들 없어요? 가족들도 있잖아요?


안나는 눈웃음으로 그의 마음과 주파수를 맞추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를 마음으로 껴안아 주고 싶었다.

 

없어.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야. 아무도 나를 친구 삼지 않았고, 가족들은 언제나 나를 힘들어해.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 그래서 나를 여기 보낸 거고. 네가 박스 속에 들어있었던 것처럼 나를 여기 가뒀는지도 모르고. 자기들 힘들게 하지 말고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뭐가 그렇게 힘들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힘들어.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 그걸 평생 해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고. 그래서 우울해. 불쑥불쑥 화가 치밀고.

 

화가 나면 어떻게 해요?


어딘가로 무작정 떠나. 그냥 있으면 내가 사고 칠 것 같거든. 누군가를, 특히 한 공간에 같이 있는 사람을 죽이거나 나를 죽이거나….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거야.


조용히, 그리고 힘들이지 않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안나는 그가 가슴을 쥐어짜듯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요?


그냥 어디론가 가야 했어. 낯선 도시를 떠돌다가 실종신고가 접수돼 붙들려오고, 아이들이 떠난 빈 교실에 캄캄해질 때까지 가만 앉아있다가 자정부터 작동하는 자동경비시스템 침입 신고 벨이 울려 붙잡혀 가기도 하고, 버스 차고지에 있는 빈 버스에 몰래 들어가 있다가 다음 날 새벽 자율운행하는 첫차를 점검하러 나왔다가 나를 보고 놀란 정비기사의 신고로 경찰에 끌려가기도 하고. 그때마다 아빠가 빼내고.

 

뭔가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군요.


안나는 그가 뭔가에 짓눌려 필사적으로 버티고, 필사적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나는 그가 참 불쌍했다.

 

모르겠어, 그게 뭔지.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마음 집중이 안 되고 화가 끓어오르고 분노가 치솟고. 여러 차례 병원에 끌려갔어. 그때마다 지옥을 경험했고. 시간이 갈수록 죽이고 싶은 대상이 자꾸 늘어났어. 겁이 난 엄마아빠가 여기 보낸 거야. 방학 동안 여기서 병원 드나드느라 못한 밀린 공부도 하고 휴양하라고. 그들이 너무 힘들고 내가 성가셔서 가둔 거야.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두고 밖에서 잠근 거야. 자신들과 다른 질병에 감염된 자는 격리시키잖아.

 

안나는 자신의 몸을 그에게 최대한 밀착시켜 그의 몸을 쓰다듬고 그의 마음을 쓰다듬었다. 그가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면 그가 자신의 어둠을 풀어내도록 정성을 다했다. 안나의 마음도 평안하고 고요해졌다. 소년은 말이 많아졌다. 자신의 몸 안에 갇혀 있던 자신의 마음을, 입구가 묶여있는 그 마음의 주머니를 뒤집어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너와 함께 있으니까 내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아. 사람들은 내가 문제라고, 문제아라고 했거든. 내가 병들었다고 했거든. 우울증이라고, 골방증후군이라고 나를 범주화시키고 고립시켰거든. 너를 만나고 네 안에 들어가니까, 너와 함께 나를 나누니까 그런 게 아무 상관없어지는 느낌이야. 내가 치유되는 느낌이야.


안나는 그의 벗은 몸을, 발가벗은 마음을 거듭거듭 혀로 핥아주고 마음으로 쓰다듬어줬다. 안나는 자신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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