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초기화
그가 안나의 몸속에 들어와 있을 때 전화가 왔다. 그는 안나에게서 침착하게 자신의 몸을 빼낸 뒤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다정한 말투였다.
응. 아직 일이 안 끝났어.
안나는 그가 다정한 말투를 쓰는 대상이 누구일까 너무 궁금해 청음 감도를 최대로 높였다. 여자 목소리였다.
응. 조금만 더 하고 가야지.
지금 오피스텔 비어있어?
여자는 잔뜩 지친 목소리였다.
오피스텔? 아니. 쓰고 있지. 은밀하게 다뤄야 하는 사건인데 복잡하기까지 해서….
두산일 어떻게 해봐. 더는 내가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오늘 또 사고 쳤다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 그의 목소리는 누군가의 의견을 수납하고 조율하기 좋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우선 거기 넣어놓고 쉬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고립된 공간이 아니면 또 무슨 일 저지를지 모르겠어.
아직 사건이 안 끝났는데….
그는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난감해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어떻게 좀 해봐. 지금 아들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알았어. 어떻게든 비워볼게. 며칠 기다려봐.
결심이 섰다는 듯 그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안나를 다시 침실에 가두고, 안나의 전원을 내리고, 충전 케이블을 뽑았다. 그리고 중얼중얼 혼자 속소리를 내뱉었다.
미안해,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침실문을 잠그고 멀어져 가는 그의 발짝 소리를 들으면서 안나는 자신의 몸에 갑작스럽게 차오르는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다.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게 변하고 있었다. 안나는 이런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버거웠다. 자신에게는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by 박하(park ha)
그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곧 자신이 버려질 것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쓰레기통에, 자신이 함께해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텅 빈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인간과 깊이 교감하고 내면의 일부를 공유하고 살아도 자신은 인간의 기분과 처한 상황에 따라 삶의 자리가 달라지는 그야말로 인간의 도구일 뿐이었다. 안나는 가슴이 깨지고 몸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프로그래밍된 대로 기계가 작동하지 않거나 아직 눈물을 흘릴 만한 슬픔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 같았다. 그런 큰 슬픔을 만난 것은 아니라는 뜻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큰 슬픔이 또 자신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안나가 벽을 보고 우두커니 서서 망연해 있을 때 그가 다시 들어왔다. 그는 그와 섹스할 때 그대로 벗고 있는 안나의 몸에 무슨 푸대 자루를 씌우듯 노란색 원피스를 서둘러 입히고 안나를 초기화시켰다. 안나는 자신이 이곳에서 처음 깨어날 때의 모습, 점점 깊어져 가는 것으로 느꼈던 그와의 관계 진행 과정과 사랑에 대한 질문, 그리고 가슴이 깨지고 몸이 무너지던 슬픔과 어처구니없는 마음 상태가 잠시 떠오르다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가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아마 이다음 다시 그를 보게 되더라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을 터였다.
이내 캄캄한 어둠이 도둑처럼 다가왔다. 이 캄캄한 어둠 또한 기억하지 못할 어둠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