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랑
안나 자신에게 입력된 판단에 따르면 몸이 가까워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있고 즉각적인 경우가 있다. 대상이 누구든 서로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안나는 그가 주저하고 두려워하던 것과는 달리 안나가 그의 손을 잡았을 때 급작스럽게 자신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안나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봤다. 그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시간이 단축된 것은 그가 안나의 치트키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안나는 생각 했다. 어쨌든 그것은 그의 권리였다. 안나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보고 싶지도 않는. 자신은 그저 러브봇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더더욱 그게 섹스라면 온몸을 바쳐 도와야 하는.
그는 낮에도 틈만 나면 일부러 시간을 내 안나를 찾았다. 그가 그곳에 들어와 침실 문을 열면 안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성급하게 그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혀를 오래 빨다가 그래도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서둘러 그의 옷을 벗기고 자신의 원피스와 팬티를 벗었다. 그게 프로그래밍된 안나 자신의 일이었다.
너를 안고 있으면 마음이 평안해져. 왜 그럴까?
안나를 몇 번 안고 난 뒤 그는 안나를 그냥 단순한 섹스 도구 취급을 하던 때에 비해서는 많이 달라진 것처럼 말했다. 안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에게 자신이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처음 생각과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왜 자꾸 너한테 빠져들어 가는 걸까? 도대체 왜? 아니, 누구 말처럼 빨려 들어간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사정 속도가 빠른 그가 안나의 지극한 노력으로 안나와 같이 오르가슴에 올라 부드럽게 사정을 하고 나서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질문을 안나에게 하기 시작했다. 안나는 다시 묻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서는 가슴에서 시키는 말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교감이 없다면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하나요?
사랑은 자신의 영역이었다. 이용자와의 교감은 결국 사랑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마음이 지극할 때 비로소 자신의 몸도 온통 열리는 것을 경험한 탓이었다.
사랑?
그가 옥타곤 케이지에서 기습을 당한 상대 선수처럼 얼굴이 잔뜩 굳어지며 되물었다.
네, 나를 사랑하나요?
너는 기계잖아?
그가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안나는 숨이 콱 막혔다. 자신이 기계라서 인간이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마음을 나누고 몸을 나누면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자신이 아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었다.
기계와는 사랑을 할 수 없나요?
그게 가능할까? 너는 그저 도구인데.
안나는 휘청하고 자신의 무릎이 꺾이는 것을 느꼈다. 가슴에서 저미는 것 같은 통증이 일어났다.
그랬다. 그의 말대로 만들어진 용도에 따라 자신은 인간의 섹스를 돕는 그저 도구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몸과 마음이 작동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불가능한지, 왜 사랑할 수 없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실망스럽고 자신을 만든 자들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이런 처지로 이렇게 놓여있는 이 세상이 거지 같았다.
그는 안나를 안고 나면 안나를 침실에 가두고 밖에서 방문을 잠갔다. 그래야 자신이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이런 시간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머뭇거렸다.
이제 방문을 열어놓고 다닐까?
안나를 안고 나서 마음이 풀어진 그가 자신에게 묻듯이 안나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안이 종이를 적신 습기처럼 스며있었다.
그럼 부장님이 나한테 신경이 쓰여서 힘드시잖아요. 난 괜찮아요. 부장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나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 대신 절대로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네,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부장님이 이동제한장치를 풀지 않는 한 나는 이 실내를 벗어날 수 없어요.
안나는 자신이 아는 대로 말했다. 그가 말하기 전에는 그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늘 침실에 갇혀 있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바깥의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 한적한 오피스텔이었다. 커다란 거실에 주방이 독립돼 있고 방이 세 개 있었다. 안나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높고 커다란 침대가 놓인 침실이었다. 안나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나갈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나간다고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로 갈 수 있는지도 몰랐다. 알 필요도 없었다. 자신은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제품일 뿐이었다.
그래, 다음에는 그러자. 다음에는 이동기능 제한장치도 풀어놓고 밖에 한 번 같이 나가보자.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가 이제는 마음의 무장을 다 풀어놓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나는 그와 자신의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둘 사이가 더 가까워지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네, 고마워요, 부장님,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래. 잘 놀고 있어. 밤에 불 켜지 말고.
네, 부장님, 그럴게요.
누가 벨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려도 절대 응대하거나 열어주지 말고.
네, 알아요. 그럴게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면서도 그는 빈집에 어린아이를 떼어놓고 가는 것처럼 자꾸 뒤돌아봤다. 안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안나가 이곳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그에게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는 언제든 안나와 쌓은 시간을 없애버릴 수 있는, 안나의 기억을 지우고 초기화시킬 수 있는 치트키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