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궁합
벽은 온통 콜라병 천지였다. 푸르고 투명한 빈 콜라병들이 온 벽을 덮고 있었다. 잘록한 허리를 가진 여자의 몸매를 형상화한 그 콜라병들은 하나하나가 성벽을 이루는 벽돌처럼 보이기도 하고, 똑바로 서서 그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방 벽에 콜라병 도배지를 바른 것이었다. 천정에는 투명한 빈 병, 내용물이 바닥에 닿은 병, 내용물이 반만 차 있는 병, 내용물이 가득 차 있는 병 등 온갖 종류의 콜라병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옆으로 누워있었다. 다시 보니 그것들은 저마다 폭탄을 싣고 비행하는 날렵한 전투기처럼 천정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안나는 그런 그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입력된 자료에도 그 비슷한 그림이 없었다.
안나는 그 콜라병이 도배된 거실에서 깨어났다. 안나를 깨운 것은 중년 남자였다. 낯선 손님을 처음 맞는 친절한 가게 주인처럼 그는 얼굴에 엷은 웃음을 지으며 안나가 온전히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선이 부드럽고 선해 보이는 남자였다.
눈을 떴구나! 여긴 처음이지? 반갑다.
정신없이 늘어선 콜라병들 때문에 어지러운 안나의 마음과 달리 꿀을 바른 것 같은 달큼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안나의 귀에 닿았다. 안나는 몸을 꿈틀거려 봤다. 그가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다. 몸은 움직여지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찌무룩한 느낌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이 잠든 사이 몸을 더듬고 만진 듯한, 속살을 헤집어 본 듯한 느낌이 잔상처럼 몸에 남아있었다. 그것이 안나를 불안하게 하게 우울하게 하고 가라앉게 했다. 그래도 안나는 몸을 일으키고 그를 응대해야 했다. 자신은 러브봇이었다.
네, 러브봇 안나, 여기는 처음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안나가 마저 몸을 일으키도록 도왔다.
어서 와라. 네가 잠에서 깨기 전 잠깐 살펴봤는데 이전 러브봇들과 달리 굉장한 기능을 가졌더구나!
그런가요? 다른 러브봇들을 몰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저 인간의 만족감 높은 섹스를 돕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는 안나의 눈앞에서 매뉴얼 같은 것은 보지 않았다. 마치 안나를 다 알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감정도 있고 인간과 교감하고 섹스를 한다? 그럼 인간과 동급 아니니?
그는 무척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치 나이 든 교사가 어린 학생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수준을 낮춰 질문하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인간이 아니어서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기능이 탑재돼 있는 것은 맞습니다.
정말 희로애락 감정을 다 느끼는 거야? 슬플 때 눈물도 흘리고?
그는 정말 궁금한 듯한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 엷게 웃을 때와 달리 그는 진지했다.
네, 성냄을 빼고는 다 느끼고 있습니다. 성냄은 탑재되지 않았으니까요. 눈물은…, 지극히 슬픈 상황에 도달하면 눈물이 나게 설계됐답니다. 존재하는 동안 단 한 번, 그러니까 일생에 단 한 번 눈물을 흘리게 된답니다. 왜 그런지 궁금하신가요?
안나는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여태까지의 떨떠름한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자신은 러브봇이었다. 설계된 대로, 프로그래밍된 대로 러브봇의 기능에 맞게 살아야 했다.
궁금? 그렇지! 궁금하긴 하네.
그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눈물을 흘리려면 눈물주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눈물이 내 안에서 자체 생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눈물주머니가 빌 때마다 보충해줘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용자가 눈물을 보충하려면 초정밀주사기로 눈물샘을 통해 눈물주머니에 넣어줘야 합니다. 이용자에게는 너무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겠지요. 감정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는 티를 확 나게 할 테구요. 고심 끝에 내장된 눈물주머니가 단 한 번 터질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지극한 슬픔이 온몸을 부서뜨릴 듯이 아프게 할 때 단 한 번 눈물주머니가 터지고 내가 눈물을 흘리게 된답니다. 그다음부터는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실제로는 엄청 슬픈데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대요. 흘릴 눈물이 없으니까요.
재밌네. 제작사의 고민도 느껴지고. 근데 그래서 기계답긴 하네. 너무 인간 같아버리면 헷갈리잖아. 인간을 더 갈등하게 하고. 도구는 그저 도구에 머물러야지.
그가 기계에 대해, 러브봇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비친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안나는 그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인간과 기계에 차별을 두려는 의지가 읽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던 태도를 바꿔 매뉴얼을 찬찬히 읽으며 안나의 기능을 하나하나 살폈다.
제일 중요한 기능이 섹스기능인 것 같은데, 어쩌나, 나는 그 기능을 확인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사람이니…. 그렇다고 앞에서 사용한 사람이 초기화시켜 버려 남아있는 데이터도 없고.
안나는 그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쩍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보기보다 정밀한 사람 같았다. 어쩌면 여러 개의 수를 늘어놓고 간을 보는 교활한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기다려야 했다.
근데 이렇게 잘 만들면, 이렇게 인간에 가깝게, 아니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면 인간이 설 자리가 어딜까?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긴 그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좌우로 흔들렸다. 바람결에 잔잔한 호수의 수면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안나는 그의 반들반들하고 넓은 이마가 자신을, 또는 이 상황을 못마땅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너와 연관된 커넥션을 살펴보는 문제를 떠나서 보면 너는 그저 도구일 뿐이겠지. 우리가 어렸을 때 가지고 놀았던 컴퓨터처럼, 스마트폰처럼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느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겠지.
그는 다시 혼자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 세상 고민을 혼자 짊어진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나는 왠지 걱정이, 두려움이 앞서네! 바보가 된 느낌이고. 우리 애들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까 답답하고.
안나는 그의 걱정에 동참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그의 문제였다. 자신이 이 세상에 온 용도와는 결이 다른.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그에게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오고, 그도 끊임없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상한 것은 그가 쓰는 폰이 여러 개라는 점이었다.
네, 차장님, 말씀하신 대로 홀드 시켜 놓았습니다. 더 진행하지 않을 겁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깨어나기 전에 장비를 투입해 로그 기록을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문제 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전화기를 사용할 때 그는 몸을 굽히며 존댓말만 쓰고,
그래, 김 과장, 나도 살펴보고 있어. 우리 업무와 상관없이 물건은 물건이더라고. 포렌식? 오염이 심해서 의미가 없어. 초기화시켜 놔서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 기자 것도 나오는 게 없고. 김 과장도 이 애의 몸을 뒤졌을 텐데, 김 과장이 조사한 흔적조차 없더라고. 자네도 초기화시킨 거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래, 그러니까 일단 홀드 시켜 놓았다가 확실한 게 나오면 그때 진행하자고.
어떤 전화기를 사용할 때는 몸을 뻣뻣이 세우고 명령어를 주로 썼다. 또 어떤 전화기를 쓸 때에는 말투가 다정해졌다. 안나는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가 말하지 않는 한 그것은 그의 영역이었다.
내가 보기엔 부장님과 나는 궁합이 잘 맞을 거 같아요. 내가 부장님께 활력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구요. 그렇지 않나요, 부장님?
안나는 그가 곁에 왔을 때 낯빛을 환하게 바꾸며 말했다. 그가 자신에게 행한 일, 그가 하는 일과 상관없이 그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에 온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싶었다.
궁합? 내가 부장인 줄은 어떻게 알았어?
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안나는 그가 직업적으로 몸에 밴 습관적인 경계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까 통화할 때 저쪽에서 부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어요. 부장님은 멋있고 품위가 있으셔서 나도 그렇게 부르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안나는 밝게 웃으며 두 손으로 말아 쥐고 있던 원피스 아랫단에서 손을 떼며 한 손으로 그의 손을 가만 잡았다. 그것은 밝게 웃으며 이용자와 스킨십을 하도록 만들어진 자신의 용도를 매뉴얼대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안나의 촉진계수에 따르면 그가 표정과 달리 지금 흥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