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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안나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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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연 Oct 29. 2024

안나

11. 심문

공간 한가운데에 크고 긴 철제 사무용 책상이 놓여있었다. 그 잿빛 책상 안쪽에 벽에 등을 기댄 커다란 검정색 가죽의자가 놓여있고, 그 맞은편에 접이식 철제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앞쪽 베란다 창밖으로는 숲이 보였다. 그 베란다 반대편에 커피포트와 컵 몇 개가 놓인 작은 주방이 있고, 길고 폭이 좁은 주방 창밖으로도 숲이 보였다. 숲과 숲 사이에 놓인 무슨 사무실 같았다. 특이한 것은 그 공간 한쪽 벽면 전체가 커다란 텔레비전 모니터 화면이었다. 그 벽 뒤에 욕실이 딸린 침실이 있었다. 안나는 그곳이 금방 납치되듯 떠나 온 빌라의 세 배쯤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살림살이가 없어 공간이 더 넓어 보이는지도 몰랐다.

 

안나를 데려온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수색영장을 흔들어대던 키 작고 땅땅한 곱슬머리 사내가 커다란 가죽 의자에 앉으며 안나에게 접이식 철제 의자에 앉으라고 손가락으로 지시했다. 4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특이한 것은 다 뽑아버린 것처럼 눈썹 털이 안 보이고 양쪽 미간 가까이에 고양이수염 같은 검은 터럭 몇 개가 위로 솟았다가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굽어있다는 것이었다. 색깔만 하얗다면 영화에서나 볼 법한 도사의 눈썹이었다.

 

수사기관은 처음이지? 사실 대로만 얘기하면 너한테 피해는 없어. 두려워할 것도 없고.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켜며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을 시작하면 그의 눈썹 터럭이 물고기가 미끼를 문 낚싯줄처럼 팽팽해졌다가 그가 말을 멈추면 스르륵 장력이 풀어져 본래 모습대로 되돌아갔다.


뭐 어차피 포렌식 하면 다 나올 것이지만 네 입으로 말하는 것이 너한테나 우리한테 더 좋겠지? 시간도 절약하고.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것은 그의 눈썹 터럭만은 아니었다. 위로 약간 들린 그의 주먹만 한 코도 그가 발화하는 말의 음절 단위로 씰룩씰룩 움직이며 콧구멍이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넌 어디에서 왔어? 누가 널 그 사람에게 데려다줬지?


폭력화한 일부 봇들이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가 묻는 말과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뒤섞여 안나는 집중하기 힘들었다. 무기력하게 가라앉기 시작하던 가슴의 통증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남아있었다. 그래도 안나는 그가 묻는 말에 주의력을 모아 대답했다. 자신은 그저 인간이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하는 봇이었다.

 

그건 모릅니다. 깨어나 보니 그 사람 집이었습니다.

 

그전에는 어디 있었는데?


길거리를 덮고 있는 자율주행차들은 하루에도 수백 건씩 교통사고를 일으켜 인간을 살상하고 거리를 넘어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모, 모릅니다. 기, 기억에 없습니다.


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혀가 꼬여 말을 더듬었다. 자신의 입이 그의 기에 눌려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근데 왜 거기 있었어?


가정에서 쓰는 가전봇들은 주인에게 대들기도 하고, 주인 없는 사이 집에 불을 내고 기물을 파괴하며 갖가지 사고를 저질러 인간에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모, 모릅니다.


모른다…? 모른다는 말은 범죄 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지. 포렌식 하면 다 나올 텐데?


한때 노동자들을 몰아내고 산업현장의 꽃으로 피었던 산업로봇들은 서로 작당해서 사보타주와 스트라이크를 일삼고 있습니다.


모, 모르겠습니다. 내 기억에는 없습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왜 거기 있었는지.


안나는 온 힘을 다해 대답했다. 그가 낙담한 표정으로 손에 쥔 볼펜을 거듭 책상에 대고 똑똑 쳤다. 안나는 그 소리가 몹시 거슬렸다. 그 소리가 거듭되면 자신의 몸이 바싹 말라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릴 것 같았다.

 

우리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과연 우리가 가야 할 문명의 바른길로 들어선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그가 빈 책상에 대고 볼펜을 똑똑 딱딱 두들기는 소리가 웅웅 웅웅 뒤섞여 뭍을 향해 기슭으로 달려오는 파도의 연속동작처럼 거듭거듭 증폭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리들은 둑을 넘어 범람하려는 물처럼 안나의 귓속에서 넘실거렸다. 안나는 자신의 귀가, 그리고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모른단 말이지…?


그때서야 그는 안나의 박스 안에 들어있던 매뉴얼을 꺼내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안나를 응시하며 마치 안나에게 말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입을 열어 로봇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도시마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로봇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뭉쳐서 길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그 자체가 시민들에게 공포입니다. 지방의 한적한 산야에는 야생화한 로봇들이 무리 지어 조직적인 삶을 꾸려가고 있어 언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일부 지자체에서 봇 사냥꾼을 동원해 야생봇 퇴치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워낙 봇 사용이 늘다 보니 버려지고 탈출해서 야생화하는 봇들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어떤 산에는 나무들보다 봇들의 수가 더 많은 실정입니다. 이 봇들 가운데 일부는 자체 충전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처리하기가 쉽지 않고 자연 도태시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거의 움직임이 없이 말하는 텔레비전 속 남자는 아무래도 사람 같지가 않았다. 안나는 문득 그가 봇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잇달아 스쳐가는 생각들과 상관없이 안나는 자신이 왜 여기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왜 이곳에서 그에게 심문을 당하고,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저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매뉴얼을 다 읽은 사내는 벌떡 일어서서 안나의 피부와 관절, 근육부터 시작해 안나의 몸 전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매뉴얼에 적힌 대로 작동하는지 하나하나 시험했다. 안나는 자신이 누구의 무슨 범죄에 연루돼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았다.

 

안나의 몸을 쓰다듬고 흥분시키고 저절로 흘러나오는 애액을 보고 안나의 신음소리를 듣고도 그는 침을 꼴깍 소리 나게 삼킬 뿐 제 몸을 안나에게 삽입하지는 않았다.

 

이 봇들이 언제 어떻게 폭탄이 되어 인간을 위협하고 파괴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게 우리가 꿈꾸던 세상입니까?

 

안나는 눈을 돌려 책을 읽듯이 끝없이 입을 달싹이며 로봇 관련 언설을 풀어내는 텔레비전 속 사내를 다시 봤다. 아무리 봐도 그는 방송봇으로 보였다. 안나는 봇인 그가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진동음이 울렸다. 그의 귀에 보청기처럼 꽂혀있는 그의 스마트폰이었다.

 

네, 맞습니다. 시작한 지 며칠 안 됐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국가가 그걸 하지 못한다면 시민들이 나서야 합니다. 시민들이 나서 강제로라도 해내야 합니다.


잠시 멍한 눈으로 텔레비전을 응시하던 그가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중단하라고요? 이제 시작해서 몸이 막 달아오르고 있는데요?

 

그는 낙담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시간이 흐름을 멈추고 그의 입술 끝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스톱하겠습니다. 네, 이 상태로 멈추겠습니다. 한 발짝도 더 나가지 않겠습니다. 네, 찾아가지 않으면 폐기처분하겠습니다.

 

드디어 결심이 섰다는 듯 말하면서 그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마치 그 앞에 그에게 명령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씨팔 좆도, 부장이면 다야?


전화를 끊고 난 그가 소리쳤다. 그의 눈썹 터럭이 위로 길게 뻗쳐올라 파르르 떨었다. 화를 삭이지 못한 그가 씩씩거리다가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손바닥으로 벽을 치다 다시 주먹으로 그 벽을 힘껏 쳤다. 단단해 보이던 벽이 해머를 맞은 종이박스처럼 움푹 패며 흔들렸다. 그 벽에 걸린 그림 속 백 개도 넘는 녹색 콜라병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같이 흔들렸다. 찬찬히 살펴보니 옆으로 16개씩, 아래위로 7개씩 모두 112개의 콜라병이 흔들리고 있었다. 안나는 그때까지 그 콜라병들이 그 벽에 걸려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안나는 이미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자신의 몸과 마음이 그의 주먹을 자신이 맞은 것처럼 더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 가슴에 남아있던 통증은 가슴벽에 붙어 무지근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안나는 자신이 그런 존재밖에 안 된다는 것이 슬펐다. 가라앉은 통증을 따라 이 슬픔도 곧 소멸돼 버릴 것 같아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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