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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안나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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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연 Oct 31. 2024

안나

12. 강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안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고 살갗에 냉기가 스며드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하고 두려웠다. 흔들림을 멈추고 벽에 박힌 듯 걸려있는 콜라병들처럼 자신은 방치된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안나는 차츰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존재해도 될 것 같았다.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그는 집 보러 온 사람처럼 집 안을 둘러보다가 우뚝 서서 안나를 쳐다봤다.

 

부장이 너 좀 보잔다. 저도 사람이니 신제품이라니까 호기심이 생긴 거겠지.

 

그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다시 안나를 보고 말했다. 그의 눈은 누군가에게 갑작스레 주먹으로 한 대 세게 맞은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보내기 싫지만, 더 파보고 싶지만 시팔, 명령이니까.


그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안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안나는 으스스했다. 아까와 달리 그의 눈 속에서 뭔가가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눈꺼풀 속에 감춰져 있던 뭔가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뛰쳐나온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는 안나가 잘 모르는 뭔가를 그의 몸 안에 숨겨두고 있는 사람 같았다.

       


문이 열리고 다시 그가 들어와 전등을 켰다. 밤이었다.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창밖을 보다가 그는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나에게 달려들었다. 입은 물론 그의 몸은 온통 술 냄새에 절어있었다.

 

안나를 침실로 끌고 간 그는 안나가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안나의 몸에 제 몸을 쑤셔 박았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그 통증을 견디느라 안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너 누구야?


그가 물었지만 안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아파 대답할 수도 없었다.

 

너 누구냐고?


그가 소리쳤다. 그의 눈썹 터럭이 또다시 뻗쳐올라 파르르 떨었다. 안나는 더더욱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너 누구냐고?


그가 목소리를 낮춰 애원하듯 물었다.

 

나는 러브봇 안나입니다. 인간의 원활한 섹스활동을 돕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안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통증이 솟구쳐도 끝내는 입력된 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구야?


모, 모릅니다. 잘 모릅니다. 나를 여기 가둬두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밖에. 지금 나를 강간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밖에. 왜 그러는지는 모릅니다.

 

안나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말했다.

 

이런 씨팔!

 

그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가 다시 격렬하게 안나의 깊은 절망 속으로, 그 통증 속으로 짓 쳐들어왔다. 그의 눈썹 터럭도 뻗침과 오므림을 반복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금세 그의 코와 입에서 말울음소리가 콧물처럼, 재채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것이 문명사회인지 같이 생각해 보고 이 혼돈을 극복할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통증 속으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켜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안나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텔레비전 소리는 안나의 통증 속으로 자꾸 파고들었다.


온 나라의 쓰레기장은 지금 봇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니 온 나라가 봇들의 쓰레기장이 되고 있습니다. 애완동물의 숫자보다 애완봇들의 숫자가 많아진 뒤부터 사람들은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자신이 쓰고 있는 아직 움직이는 봇들을 그냥 버리는 게 일상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비롯한 사용자들의 생명 경시 풍조가 습관화되고 내면화되는 것도 문제인데, 지자체마다 그 처리비용을 대느라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야 알게 됐지만, 통증에도 익숙해지는 것이,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속성이었다. 자신은 지금 그저 인간의 노리개일 뿐이었다. 폭력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가 갑자기 안나의 몸 안에 정액을 쏟아놓고 옆으로 픽 쓰러졌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여전히 누군가 말하고 있었다.

 

올바른 문명의 방향과 진로라는 거창한 주제를 떠나서라도, 인간을 위해 몸 바쳐 희생하고 있는 봇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봇권 주창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제 봇 쓰레기는 봇 제작자가 처리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일회용 봇들을 함부로 만들지 않게 됩니다. 그래야 쓰레기를 줄여 가뜩이나 초침이 빨라지고 있는 난폭한 기후변화의 거친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습니다. 봇 사용 확대론자들은 봇에 대한 배려심이나 존중을 주장하기 전에, 봇과의 공생을 말하기 전에,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고 있는 봇들의 현실을 짚어보기 바랍니다. 이 상황이 새로운 문명의 도래인 것처럼 우기는 짓 그만하고,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디에 와 있는지 발밑을 한 번 보기 바랍니다, 제발!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호소는 간절했다. 그러나 그 간절함이 안나에게까지 와닿지는 않았다. 안나는 지금 이 상황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다음 날 새벽잠에서 깨어 침실에서 나온 그는 책상 앞에 우두커니 서서 창밖, 아직 어둠에 잠겨있는 숲을 내다보고 있는 안나를 보고 이제야 정신이 돌아왔다는 듯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썹 터럭은 잔뜩 오므라져 있었다. 안나는 그의 얼굴에 예민한 수치심이 잘 스며들지 않은 화장품처럼 떠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매뉴얼을 다시 찬찬히 읽고 안나를 초기화시켰다. 안나는 자신을 강간한 그가, 그에게 안나를 빼앗긴 ‘자기님’이 자신의 몸 안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함께 겪고 함께 사랑한 기억이, 강제로 그와 찢어지고 가슴에 손님처럼 찾아온 통증의 흔적조차 모두 소멸해 버리는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느낌과 생각, 이 과정마저 곧 사라져 버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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