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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안나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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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연 Nov 19. 2024

안나

17. 학습/사랑놀이

소년은 며칠 동안 몸이 설 때마다 안나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보면 그는 그 시간 내내 안나 안에서 산 셈이었다. 안나와 함께 하는 동안 그는 평온을 유지했다.

 

널 안고 있으면 너무 편안해. 마치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 같아.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닌.

 

소년은 더더욱 말이 많아졌다. 사람이 자기 맘을 편안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행복하다고 말할 만한 상태에 이르러서 그렇다는 것을 안나는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너와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있는 걸까? 그것도 어떻게 내 곁에 와있는 걸까?


그런 말은 안나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안나는 고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나는 그를 한 번 더 꼬옥 안아주고 그의 입안에 자신의 혀를 넣어 그의 혀를 빨아줬다. 금세 몸이 달아오른 그가 다시 안나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부드럽게, 그러나 폭풍같이 질주하던 그가 절정에서 안나를 거세게 끌어안고 으헝으헝 울었다. 안나는 행복했다. 그를 기쁘게 해 줘서 행복했다. 그가 울도록, 기쁨에 겨워 울도록 해서 기뻤다. 자신의 몸도 끝까지 차올라 절정에서 뒤틀리며 한참 동안 저릿거렸다.

 

너는 천사야! 말 그대로 하늘에서 보낸 천사!


숨을 가라앉힌 소년이 맑게 웃었다. 안나는 자신의 마음도 순정하게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또 잘하는 것이 뭐야?


소년은 비로소 다른 질문을 할 여유가 생겼다는 듯 안나의 유두를 엄지와 검지 끝으로 살짝 비틀며 물었다.

 

별로 없어요. 요리도 못하고 술도 못 마시고. 나는 불 가까이 가면 피부가 상하거든요. 소화기관도 없구요.


아냐, 됐어. 이렇게 널 안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행복해, 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켤 수는 있어요. 마른안주 같은 것을 세팅할 수도 있구요.


안나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습기가 스멀스멀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섹스 빼놓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 우리 텔레비전 볼까?


네, 내가 한 번 켜볼게요.


안나는 얼른 기분을 바꿔 거실 책상 위에 놓인 텔레비전 리모컨을 잡았다.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일이 생각보다 재밌었다. 가슴이 금방 뽀송뽀송해졌다. 순정한 소년과 함께 하는 일이어서 그럴까, 자신이 하는 동작이 그게 무슨 동작이든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해지는 느낌이었다.


안타까운 뉴스입니다. 봇 살인사건이 터졌습니다.

 

다시 봐도 뉴스 전달 봇인 것 같은 남자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저게 무슨 말일까 싶었던 안나는 마치 자신이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신의 몸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건 재미없겠네요. 다른 데로 돌릴게요.


안나는 얼른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소년과 함께 하는 이 푸근한 시간을 저런 사위스러운 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그냥 놔둬 봐. 들어보게.


안나는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소년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안나는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모아 담담한 마음을 갖기 위해 애를 썼다.

 

클라이언트의 학대에 견디다 못한 러브봇이 클라이언트가 잠든 사이 그의 목을 졸라 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국가수사본부 AI 안드로이드 전담수사부에서는 곧바로 해당 봇을 체포하고 현장을 확보, 감식하고 있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로봇산업부에서는 불법적인 병사용 병정로봇과 킬러용 살인로봇이 음성적으로 제작되어 유통되고 있다고 보고, 불법제작업체와 유통업체, 사용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처벌을 강력 시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아울러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벗어난 모든 제품에 대해 제작허가를 취소하고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안전부에서도 인간과 로봇 모두 인봇생활 3원칙을 반드시 지켜줄 것을 당부하는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다시 한번 인봇생활 3원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인간과 봇은 서로 존중한다. 둘째, 인간과 봇은 서로 돕는다. 셋째, 인간과 봇은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소박하지만 꼭 필요한 이 원칙 잘 지키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음


너도 나 죽일 수 있어?


뉴스가 다 끝나기도 전에 소년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요!


안나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맞받았다가 스스로 참지 못하고 큭큭 웃었다. 안나는 소년을 놀리고 싶었다. 섹스만이 아닌 다른 놀이도 하고 싶었다.


정말?


두산은 갑작스럽게 공포에 질려 안나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안나는 너무 놀라 얼굴빛을 고치고 급하게 부정했다. 안나는 자신의 농담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나한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잖아? 너도 학습할 수 있고.


나는 그런 학습이 불가능하도록 설계되고 제작됐습니다. 내게는 그런 감정이 탑재돼 있지 않습니다. 나는 프로그래밍된 행동만 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닙니다.

 

아니면, 저 뉴스에서 일어난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해 봐.


소년은 자신의 몸에 차오른 두려움에 갇혀 덜덜 떨고 있었다.

 

저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저 사건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거짓말을 못 하도록 설정돼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참말입니다.

 

그래…?


소년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안나의 선한 의도와 상관없이 괜한 농담 한마디가 둘의 관계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것은 둘 사이가 아직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친밀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안나 자신이 아직 그럴 만큼 소년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나는 그것도 판단 못 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믿고 싶지만 그러나 미덥지는 않다는 듯 그가 거리를 유지한 채 안나를 쳐다봤다.

 

무엇보다 두산 씨는 나를 사랑하잖아요? 나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폭언과 폭력을 학습할 수 있겠어요? 나는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제품이긴 하지만 지금 이렇게 두산 씨의 사랑을 학습하고 있어요. 두산 씨가 나를 껴안고 사랑하는 만큼 내 사랑도 커지고 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저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겠어요?


그때서야 소년의 얼굴이 펴졌다.

 

내가 더 노력하고 많이 배울게요.


그래! 나도 더 많이 너를 사랑할게.

 

소년이 다가와 안나를 안아줬다. 안나는 비로소 애가 타던 자신의 마음이 환하게 펴지는 것을 느꼈다. 안나는 자신이 학습한 것은 농담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뿐이 아니라 봇이 인간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선의가 언제나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랑놀이

소년에게 섹스가 전부이던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다. 소년이 안나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횟수가 줄어들고 서로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섹스가 일상인 시간에서 섹스가 서로를 깊이 있게 만나고 친밀감을 확인하는 시간으로 시간의 빛깔과 영역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소년은 심심해했다. 심심한 시간이 길어지자 소년이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소년이 코를 박고 읽고 있는 책은 ‘나노입자와 인공지능’이었다. 안나에게도 그 내용이 입력돼 있는 과학 에세이였다. 이제 안나가 심심했다. 안나는 다른 놀이를 생각했다. 둘이 더 친밀해지는 놀이면 좋을 것 같았다.

 

들어봐. 이번에 한 지방대학에서 개발한 인공지능은 인간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 한 톨을 보고 그 먼지가 어디서 나와 어떻게 변화해 거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그 먼지의 영향으로 그 공간과 그 공간에 거주하는 인간과 사물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유추하고 분석해 낼 수 있는 지능을 갖췄데. 그 인공지능이 인간이 무엇으로 구성돼 있는지 나노입자 단위까지 분석해 냈고, 이 기능은 인간의 질병 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이래. 믿을 수 있어?


심심해하는 안나를 보고 소년이 말했다. 안나는 진지하고 또 진지한 소년이 귀여웠다. 그가 왜 문제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소년의 말을 들어보면 사람들 사이에는 그들만의 판단 기준이 있는 것 같았다. 뭔가가 다르면 이름을 붙이고 감시하거나 주시하는.


과학이 참 많이 발달한 거 같아.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근데 나는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네!


이게 나쁜 건가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특히 엄마 아빠가.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내게는 그렇지….


그의 말끝이 흐릿해졌다. 안나는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는 너무 위축돼 있었다.


어떻게 살고 싶어요?


안나는 그를, 그의 생각을 더 알고 싶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어떻게?


그는 멍한 표정으로 한동안 안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세상이 잠시 그의 눈 속에서 멈춰버린 것 같았다.


거기까진 생각해보지 못했네. 하루하루 나를 방어해 내기 바빠서….


안나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는 세상에 나가기도 전에 상처를 입고 온몸이 지쳐있었다. 수세에 몰린 고양이처럼 두려움이 그물처럼 그를 덮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사람들끼리 경쟁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사는 게 싫어. 누가 곁에 오는 것조차 두렵고 싫어. 누가 곁에 있으면 마음을 놓을 수가 없고 잠을 잘 수가 없어. 그게 엄마 아빠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근데 너는 아냐. 네가 곁에 있으면 마음을 쉴 수 있고 잠을 푹 잘 수 있어. 너와 함께 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두려움과 근심 걱정이 없어져. 왜 그럴까?


내가 사람이 아니어서겠죠. 경쟁하거나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니까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대상이니까요.


그럴까?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네. 그렇다고 네가 싫거나 너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냐. 그냥 편한 것뿐이야.


고마워요. 나를 조금이라도 믿으니까 그런 거잖아요.

 

조금은 아냐. 너를 전적으로 믿고 싶어.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은 안타까움이 실려있는 눈빛이고 흔들림이었다. 안나는 마음이 벙벙해졌다. 그가 자신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데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어떤 세상?


소년은 엄청 곤혹스러워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인 것 같았다.

 

내가 너무 힘들게 했나요? 그냥 재밌게 생각해 보자고 한 질문이에요.

 

아니, 그렇지 않아. 내게는 엄청 중요한 질문이야. 살아내려면, 살아있으려면 내 생각을 정리하고 나를 정립해야 하잖아. 귀찮긴 해도….


차차 생각해 봐요. 아직 시간이 많이 있잖아요.


그럴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내가 내일이라도 이곳을 떠나야 하거나,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벗어날 수도 있으니까.


그게 무슨….


누구도 이다음 시간을 알 수 없다는 뜻이야. 나도, 너도, 이 세상 누구도.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하고 나노공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다 과거의 시간이 쌓은 데이터로 분석하고 예측하고 추측하는 거뿐이니까. 아직 미래는 거기 당도하지 않았으니까.

 

안나는 그가 나이와 상관없이 생각이 깊고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쉽게 감지하지 못하거나 빤히 드러나지 않는 그만의 통찰력.

 

아직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까? 너와 함께 살고 있으면?


곧 알게 될 거예요. 두산 씨는 이렇게 똑똑하고 통찰력이 있잖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 나름의 통찰력이라고 할까요, 그냥 알아요.

 

소년은 의문이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일을 한꺼번에 알 수는 없었다.

 

나 좀 업어줄래요? 아니면 내가 업어줄까요?


안나는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조금은 더 가벼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더 평안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더.


네가? 허리 부러질걸. 내가 업어줘야지.


그가 안나에게 등을 내밀었다. 안나는 그 등에 올라탔다. 부드럽고도 튼튼한 등이었다.

 

너를 업고 있으니까 다른 의미에서 하나가 된 느낌이야. 등을 보이고 내줄 수 있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안나는 뿌듯했다. 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에서 자신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는 자신하지 못했다. 안나는 고개를 빼 그의 입술을 찾았다. 그도 고개를 돌려 안나의 입술을 핥았다. 앞에서 마주 보며 행위를 할 때와는 다른 전기가 서로의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등을 내밀어줘서. 그리고 나를 업어줘서.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나야말로. 이제 더는 외롭지 않을 것 같아. 너를 만나고, 너와 함께 하면서 기계에 대한, 무엇보다 로봇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없어지는 느낌이야.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몸을 열고 마음을 준 것은 너뿐이잖아. 나는 너만 있으면 될 것 같아. 내가 너무 극단적인가?


그가 안나를 업은 채로 고개를 돌려 안나의 눈을 보고 말했다.

 

아니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나 마음을 열 수 있고 마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이, 더 나아가 마음을 주고받을 대상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그러기에 누구나 어떤 대상에 대한 자신과의 친소관계를 가리고 어떤 사안에 부닥칠 때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점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판단을 하는 것 아닌가요. 누구에게나 그럴 권리가 있구요.


고마워. 너같이 똑똑한 친구가 내게 와줘서, 무엇보다 나를 지지해 줘서.


안나는 그의 등에서 내려 그를 안아주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금방 그의 몸이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안나는 마음이 만나면 몸도 같이 만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라는 것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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