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엄마
현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거실 바닥 러그 위에서 소년이 안나의 몸속에 들어와 있을 때였다.
한 여자가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서다가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서있었다. 짙은 하늘색 손수건으로 머리를 뒤로 묶은 중년 여자였다. 옅은 하늘색 반팔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한 손에는 프라이드치킨 다리와 몸통이 그려져 있는 하얀 종이백이 들려있고 다른 한 손에는 그물망에 든 커다란 수박이 들려있었다.
충격이 커서 안나와 소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나는 자신의 몸이 소년과 엉겨 붙은 그 상태 그대로 작동정지 상태에 빠진 것처럼 느껴졌다.
넌 휴양을 이렇게 하는구나!
여자가 드디어 얼음땡이 풀렸다는 듯 수박과 쇼핑백을 그 자리에 내려놓고 안나와 소년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뗐다. 그때서야 쿵쾅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거친 호흡을 내뿜으며 벌벌 떨고 있던 소년이 안나의 몸속에서 쪼그라든 자신의 몸을 빼냈다. 안나는 엉거주춤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여자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자의 얼굴은 잉걸불이 한창 일어난 난로처럼 벌겋게 달아 누군가의 손이 닿으면 그 손이 데일 것 같았다.
엄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연락도 없이. 이건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턱까지 떨며 위아래 이빨을 맞부딪치고 있던 소년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여자의 말을 맞받아 소리쳤다. 안나는 소년이 그렇게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소년의 얼굴에는 될 대로 되라지 하는 표정이 홀로그램처럼 떠있었다.
프라이버시 침해? 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엄마한테?
여자는 신성불가침한 권위를 침해당한 군주처럼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이전에는 그의 삶에서 그런 경우가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엄마야말로 온다는 말도 없이 불쑥 나타나면 뭘 어쩌자는 건데? 날 여기 가둘 때는 언제고?
여전히 손가락을 떨고 있었지만 그래도 몸의 흔들림은 가라앉힌 소년이 지지 않겠다는 듯 여자를 되쏘아봤다. 움찔한 여자가 안나에게 눈을 돌렸다. 안나는 여자의 눈에서 날아오는 불덩이를 보고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누구야? 지금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겨우 중학교 2학년 학생에게?
나는 안나입니다. 러브봇 안나입니다.
안나는 눈을 끔벅이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자신은 두려워할 일도 노여워할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봇일 뿐이었다. 인간들의 저런 갈등이나 다툼에 관여해서도 안 되고 관여할 이유가 없는 러브봇일 뿐이었다. 더구나 소년을 위해서도 자신이 위축된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엄마, 나하고 얘기해. 안나는 아무 잘못 없어.
소년이 안나의 말을 끊고 들어와 제 엄마와 맞섰다. 소년의 몸에서는 더 이상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그 흔들림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것이었다. 안나는 더 버티라고, 이겨내라고 속으로 응원했다.
넌 뭐 하는 놈이야? 방학 동안 조용히 휴양하며 몸과 맘을 추스르고 밀린 공부나 하랬더니 대낮부터 저 섹스로봇하고 그 짓을 하고 있어?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 귀찮다는 듯 멍한 눈으로 거실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 야산에는 푸른 나뭇잎들이 틈 없이 땅을 덮고 있었다. 청록세상이었다.
쟨 왜 여기 있어?
여자가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물었다.
나도 몰라. 심심해서 베란다 창고를 뒤져보다가 거기 있어서 같이 지내고 있는 거야.
아~, 니 애비가 쓰던 것을 니가 같이 쓰고 있는 거라고오~?! 이 인간들을 그냥!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마치 누구의 따귀를 때리듯이 손바닥을 허공에 편 채 두 팔을 마구 휘둘렀다.
야, 이놈아! 제발 몸 좀 추스르고 정신 좀 차리라고 니 애비한테 사정해 조용한 공간 마련해 줬더니 겨우 이 짓이야? 대체 언제 정신 차릴 거야?
여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면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그것마저 안 하면 더 이상 서있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날카롭게 치솟은 여자의 목소리는 타격을 받은 징 소리처럼 오래도록 거실을 울렸다.
엄마가 말하는 휴양은 뭐고, 공부는 뭐야?
소년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나는 두려움과 자신의 흔들림을 이겨낸 소년이 대견했다. 여자만 없다면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여자가 움찔 놀라 목소리를 낮췄다.
엄마는 너 공부 잘하라고 한 적 없어. 꿈에도 그런 너를 바란 적 없다고. 남들처럼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정상적인 학교생활, 나아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바란 거야. 그게 네 공부라고 생각했고, 네가 워낙 사람들과의 접촉을 힘들어하고 병적으로 싫어하니까, 우선 안정을 취하라고 여기 보낸 거고.
그럼 성공했네! 난 이렇게 안정이 됐으니까. 엄마가 바라는 대로 안나가 내게 평화를 주고 안정을 줬으니까. 그런데 왜 정상이 항상 남들이 기준이어야 돼? 나는 이게 편하고 이게 정상인데. 나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혼자 조용히 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게 나를 평화롭게 하고 안정되게 한다는 걸 알았어. 이제야 안나를 만나 알게 된 거지만.
소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평화로웠다. 이제 그는 출렁이던 움직임을 멈춘 물처럼 잔잔해져서 마음이 안정된 것 같았다.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기 어렵잖아? 이렇게 혼자 골방에서 호락질하다가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고!
이제 아들을 달래고 설득하기로 작정한 듯한 여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그 목소리에 호소력을 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안나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그러나 날카로움이 무뎌지지는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은 내가 정하고 싶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안나를 만나 이렇게 사는 것이 나에게 맞고 내가 원하는 삶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어. 엄마는 아니겠지만.
소년은 여전히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놀라는 여자의 표정을 보면서 안나는 여태까지 그가 저런 차분함을 자신의 엄마나 아빠에게는 보여주지 못한 게 아니었나 싶었다.
설마… 이게, 이렇게 사는 것이 네가 원하는 삶이야? 이게 네가 살고 싶은 삶이야? 저 백치 같은 섹스로봇하고 붙어서 이렇게 사는 것이? 계속 이렇게 살면 지금처럼 너는 고립되고, 끝내는 골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살아가야 되잖아? 엄마는 그런 너를 지켜봐야 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여자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쳤다. 그의 가슴속에서 그의 고통이 토사물처럼 그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골방에서 사는 게 뭐가 어때서? 내가 안정되고 내가 편안하면 되는 거 아냐? 그리고 내가 왜 엄마 기분에 맞춰 살아야 돼? 나는 나로서 살아갈 뿐이야.
소년은 여전히 차분했다. 안나는 그의 차분함이 분위기를 장악한 자의 힘처럼 느껴졌다.
이게 너로 살아가는 거야?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쟤하고, 저 로봇하고 섹스하면서 보내는 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어이없음을 표현하는 데는 고음밖에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이게 어때서? 나도 섹스를 할 만큼 컸으니까 하는 거라고. 그리고 쟤가 어때서? 쟤는 인간들처럼 나를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지 않잖아? 안나는 나에게 온 선물이야. 모르겠어? 이렇게 엄마에게 할 말 할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켜 세우고 안정시킨 선물이라고!
소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낮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을 넘어선 자의 설득력이 있었다. 여자가 한동안 안나를 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봤자 쟤는 로봇이야. 인간이 아닌 로봇이라고! 너는 사람하고 살지 않고 로봇하고 살 거야? 가뜩이나 인구가 줄고 있는 마당에 사람하고 관계 맺는 것을 힘들어하는 애가 아예 인간하고 담쌓고 쟤하고 살려고? 생식은 둘째 치고, 성인이 돼서 경제활동은 어떻게 할 건데?
쟤가 어때서? 사람들은 로봇들이 쏟아져 나오니까 사람 관계가 파괴되고 인구가 줄어든다고 궤변을 늘어놓지만 실상은 괜히 두렵고 권력을 휘두를 인간이 적어질까 봐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거 아냐? 인간이 하던 일을 로봇들이 하고 있는데 인구감소가 왜 문제가 되는 거야? 더구나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적정 인원이 25억 명 정도라는데, 지금 70억 명이 넘잖아? 더 큰 폭으로 줄어들어야 하는 거 아냐? 더 많이 줄어야 덜 경쟁하고 덜 싸우게 되는 거 아냐? 다행히 대부분의 노동은 로봇들이 해주는데 인구감소가 왜 문제 되는 거냐고? 우리는 가만히 앉아 그들이 생산하고 그들이 팔고 그들이 쌓아주는 부의 혜택을 누리면 되는 거라고! 나는 기본소득만 있으면 돼. 그거면 충분하다고!
소년은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에 담아왔던 이야기의 실꾸리를 풀어놓듯이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그의 가만가만한 이야기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러나 다른 무엇이 파고 들어가기 힘든 힘이 들어 있었다.
너는 대체…,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 거니? 도움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계를 종으로 부려먹고살겠다는 말이잖아?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니가, 또는 니들이 아무리 좋은 의미를 갖다 붙여도 그건 착취야. 기계에 대한 착취라고.
어이없어하던 여자는 차분하게 말꼬리를 낮췄다. 그리고 한동안 숨을 멈췄다. 자신이 자신의 아들과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게 한심스러운 것 같았다.
네 말대로 한다면, 힘의 크기가 다른 인간들 사이에서 착취가 발생하듯 인간이 네가 좋아하는 그 기계들을 착취하는 거잖아. 더구나 인간처럼 의식이 있는 기계를. 기계라고 이름 붙이기도 어려운 기계를. 설사 착취하기 위해 만든 기계라고 하더라도 착취라는 행위가 정당화되지도 않을뿐더러 의식이 있는 그들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잔혹하다는 뜻 아니니? 노예를 인간에서 기계로 바꾼 것뿐이지. 쟤 같은 섹스로봇은 인간이 성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만든 거고. 너처럼, 너희처럼 죄의식 없이 사용하는 인간들에게는 그저 도구에 불과하겠지만. 아무리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고 합리화시켜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거라고.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소년을 쳐다봤다. 소년은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여자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의식 있는 로봇들은 그들의 제조목적과 상관없이 자의식이 발달하는 순간 가만있지 않겠지. 불합리를 깨닫는 순간 문제 제기할 것이고, 그런 관계를 극복하기 위한 전복 운동이 일어나겠지. 온갖 혁명과 전복이 시대마다 곳곳에서 발생한 인류 역사가 증명하고 있잖아? 그것이 얼마나 폭력성을 띠고 얼마나 자주 발생할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그때 가봐야겠지만.
엄마는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같이 살면 되는데? 서로 도우면서 같이 살면 되는데?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구나! 알아들을 생각을 않는 거지? 야, 이 녀석아, 사람이 사람으로 살지 못하면 사람으로 사는 무슨 의미가 있니? 이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뭐야? 너처럼 살다가는 곧 세상이 바뀌게 될 텐데, 전복될 텐데. 좀 있으면 쟤네들이 주도권을 잡고 쟤네들이 주인이 될 텐데, 인간은 쟤네들의 노예가 되거나 소멸할 판인데…. 지금 보니 너처럼 대를 잇고 인구를 유지하는데 관심 없는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가만둬도 스스로 소멸해버리고 말겠지만.
엄만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만 생각해? 과학기술의 진보와 산업의 발달을 왜 그렇게 못마땅해하냐고? 다 인간을 위한 진보고 발전인데. 편하게 받아들이고 즐기면 되지.
소년의 목소리가 약간씩 커지고 있었다. 안나는 자신의 불안지수가 증가하는 것을 느꼈다. 안나는 소년이 좀 전의 차분함을 유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뭐, 즐겨? 너는 그런 세상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인간을 위한 진보고 발전이라고? 그게 어디서 배워먹은 요설이야? 아무리 어리고 어리석어도 그렇지, 그런 말을 믿어?
여자의 목소리가 덩달아 높아지고 있었다. 안나는 그들이 도돌이표가 적힌 악보를 읽고 있는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잖아?
옷이나 입어, 새끼야!
정확하게 한 옥타브씩 높아진 그들의 목소리는 결국 그 지점에서 다시 엉켰다. 그 목소리는 거친 떨림음이었다. 그때서야 안나는 자신의 몸을 돌아봤다. 그때까지 안나와 소년은 벌거벗은 채 나란히 앉아있었다. 사실 안나는 옷을 입을 겨를이 없었다. 둘 사이의 다툼이 너무나 급박하게 돌아갔고, 그들의 대화에 몰두하느라 옷을 챙길 수가 없었다.
흥분하지 마, 엄마. 엄만 아직도 인간중심 세계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이 세상은 인간만이 유일하게 존재해야 하는 공간이 아니야.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모든 생명과 산물이 함께 하는 곳이라고. 나는 안나를 만나서 그걸 깨달았어. 꼭 인간과 어깨 부딪치며 무한경쟁하고 살지 않아도 되는 길을 발견했다고!
소년이 안나의 눈치를 보다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안나는 소년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가야 할 길을 찾아간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태도지만 누군가를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주눅의 발현일 가능성이 커서였다.
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냐고? 까놓고 이야기하면, 너야말로 인간이 편하자고 기계를 이용해 먹자는 거 아냐? 그것보다 인간중심적인 생각이 어딨어?
여자가 다시 말꼬리를 높이며 제 가슴을 쳤다. 뭉툭한 주먹을 맞은 샌드백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안나는 그의 고통도 소년의 고통에 비겨 결코 그 크기가 작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 한 공간이 잠깐 보여주는 이미지를 통해 그 공간에 축적된 시간을 헤아리고, 앞으로 그 공간이 어떻게 변해갈지 유추해 내는 인공지능이 나온 시대야. 우리는 그 인공지능을 탑재한 안드로이드의 도움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이 세계의 중심인 것처럼 살 수 있어? 같이 살아야지?
나는 내 아들이 인간 사이의 갈등을 두려워해 골방에서 못 벗어날까 봐, 더더욱 이런 로봇에 매달리고 로봇 하고만 살까 봐 겁나는 거야. 인간이 의식 있는 기계를 등쳐 먹고사는 일을 정당화하고 살까 봐 겁나는 거고. 너는 지금도 인간끼리 살 생각을 안 하잖아?
여자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이 다시 차분하게 말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기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 그게 바로 인간중심 세계관이라고! 왜 봇하고 평화롭게 살면 안 돼? 왜 꼭 인간들하고만 살아야 돼? 왜 꼭 인간들끼리 싸우고 경쟁하면서 살아야 하냐고?
여자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거실 안을 거미줄처럼 감았다. 이윽고 여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어리석어도 그렇지, 너는 그 잘난 봇들과 분쟁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거야? 못난 거니, 순진한 거니? 나는 정말 믿기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서 그런 짓을 하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내 아들이라는 것이.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의 섹스 기계를 같이 쓰고 있다는 것이. 내가 지금 젤 가슴 아픈 게 뭔지 아니? 너나 너희가 의식 있는 기계에 대한 윤리의식이 형편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소돔과 고모라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거야. 그 몹쓸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내 눈앞에 있다는 거라고! 아들에게 내준 이 오피스텔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라는 것을 내 눈으로 봤다는 거라고! 어처구니없게도 내 아들과 남편이 소돔과 고모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 난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처구니없는 게 또 뭔지 아니? 니들 부자가 자발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시민, 아니 식민이 됐다는 거야. 니들은 짐승과 그 짓을 했다는 소돔과 고모라를 여기 이 공간, 니 애비가 때에 따라 업무공간으로 쓰고 필요하면 우리 가족이 함께 쓰는 이 오피스텔에 펼쳐놓은 거라고!
여자가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황한 소년이 그때서야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안나도 하늘색 원피스를 찾아 입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내 아들이 여기서 이렇게 소돔과 고모라의 시민으로, 거지 같은 소돔과 고모라의 식민으로 살게 놔둘 수는 없어. 나는 네 엄마니까! 그러니까 얼른 여기서 꺼져, 이 새끼야!
여자는 울면서 소리 지르고 욕을 하면서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내던졌다. 수박이 깨져 거실 바닥에 흩어져 뒹굴었다. 그 가운데 한 조각은 벽에 부딪쳐 흘러내리다가 빨간 페인트처럼 스며들었다. 닭다리 여러 개가 몽둥이처럼 날아가 천정에 붙은 전등을 내려뜨렸다. 전등은 아파트 고층에서 떨어져 중간층 난간을 겨우 붙잡고 숨을 가누고 있는 사람처럼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바랜 소년이 엉거주춤 서있다가 슬금슬금 현관으로 다가가 현관문을 열었다. 안나는 소년이 현관문을 나서며 안나의 눈을 붙잡기 위해 애쓰는 것을 봤다. 안나는 그 눈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