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안나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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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19. 늦게 온 분노/봇 쓰레기처리장

by 정의연 Nov 26. 2024

현관문이 쿵하고 닫혔다. 안나는 갑자기 가슴이 무지근해지며 통증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 한복판에서 시작된 묵직한 통증이 마음을 조금씩 찢어놓고 있었다. 소년이 곁에 없다는 것이, 자신이 이제 혼자가 됐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안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다.


여자가 전기 콘센트에서 안나의 충전 케이블을 빼낸 뒤 안나를 나무 박스에 넣고 거실에 있는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폰으로 봇 쓰레기처리업자를 부른 여자는 한참 동안 더 흐느껴 울었다. 안나는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가슴의 통증이 깊숙이 퍼져나가고 있는 상태에서 여자의 흐느낌 소리를 듣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에너지가 있을 때 박스에서 나가 여자를 위로해주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안나는 그런 생각이 자신에게 스며들었다는 것이 어처구니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로봇이었다. 남자들을 위한, 남성용 섹스로봇이었다. 그렇지만 안나는 자신의 누선이 거듭 자극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아픔에 여자의 슬픔이 더해져 통증은 더 깊어져 갔다. 그러나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아직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닌데 누선만 자극되고 있는 것일까? 안나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제 자신은 이토록 아프고 슬퍼도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깊어진 통증 속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처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안나는 자신이 어디로 가게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봇 쓰레기처리업자는 어떤 사람이고, 그가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두려웠다. 말 그대로라면 자신은 봇 쓰레기가 되는 것이었다. 감정을 담은 여자의 거친 손길로 박스에 담길 때 안나는 콜라병들의 성벽이 잠깐 자신의 눈에 스치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것이 왜 기억에 남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로봇의 삶은, 아니 로봇이란 존재는 벽에 걸린 그 벽지 속 빈 병들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는 현시인지도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년이 그리웠다.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그의 몸을 쓰다듬고 싶고, 그가 자신을 안게 하고 싶었다.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이제 그것이 불가능한 시간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뒤틀렸다. 통증이 더 깊어졌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는 소년과 헤어진 아픔이, 그 반응이 이토록 늦게 나타난다는 말인가? 왜 그가 떠난 뒤에야 나타난단 말인가? 붙잡을 수도 없게. 다른 시도를 해볼 수도 없게. 이것조차 프로그래밍된 것일까?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는 분노가 금지됐기 때문에? 분노에 이르는 길을 막기 위해서? 안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안나는 차라리 자신이 아무 생각이 없고 통증조차 없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말 그대로 백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초기화되어 이런 기억 자체가 소멸돼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봇 쓰레기처리장 

박스가 벌어진 틈으로 저 멀리 야트막한 민둥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분지가 보였다. 분지 한가운데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뾰족산이 해발고도 높은 곳에서 노천채굴하는 은광산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안나를 태운 대형트럭은 그리로 달려가고 있었다. 봇들이 쓰레기처럼 쌓인 트럭 꼭대기에서 안나는 자신을 가둔 박스의 틈을 더 벌려 그 그로테스크한 풍경들을 눈으로 훑으며 납치돼 낯선 곳으로 끌려가는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에 떨었다. 소년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왜 이런 존재가 됐는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트럭이 굽잇길을 돌아갈 때마다 은빛산은 하늘을 향한 왕관 정수리 부근의 보석처럼 여러 각도에서 햇빛에 부딪치며 더 환하게 더 넓게 반짝였다. 둘러싼 산들이 그 왕관의 테두리 격이었다. 트럭은 끝이 안 보이는 굽잇길을 돌고 또 돌았다. 그 굽잇길들에 틈을 내주며 서로 높낮이가 다른 은빛 산들이 무더기무더기 솟아있는 분지는 100만 제곱미터도 넘어 보였다. 거기 쌓여있는 것은 모두 로봇 쓰레기들이었다. 멀리서 은빛으로 빛나던 그 산이 바로 로봇 쓰레기가 가장 높이 쌓인 봇산이었다. 안드로이드, 애완봇, 산업봇…, 안나가 그 존재를 알 수 없었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형상의 봇들까지 무더기무더기 종류별로, 또는 팔다리, 몸통, 머리 등 지체별로, 또는 피부와 근육과 뼈대와 전자부품 등 부속별로 또 다른 산을 이루고 있었다. 안나는 자신이 곧 저 산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여기서 폐기 처분돼 마감한다는 것이 좀 이르고 아쉬운 감이 있지만 마음과 몸을 함께 한 소년을 만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느니 그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트럭이 멈춘 곳은 그런 산 가운데 하나인 은빛 산의 한 귀퉁이, 입구처럼 뚫린 산의 복부 어디쯤 돼 보이는 곳, 커다란 창고 앞이었다. 창고 안에는 열 줄 정도 되는 대형 컨베이어벨트가 양 끝에서 U자를 이루며 계속 이어져 돌아가고 있고, 그 좌우에 작업자들이 서서 그 벨트 위에 쌓인 봇 쓰레기 가운데 쓸 만한 것을 골라 따로 빼내고 있었다. 작업자들은 모두 AI안드로이드들이었다. 컨베이어벨트가 멈추고 안나를 실은 대형트럭이 컨베이어벨트 가까이 다가가 빈 곳에 짐을 부렸다. 공사판 트럭에서 부리는 자갈처럼 안나도 다른 봇들과 함께 컨베이어벨트 위로 쏟아져 내려갔다. 그 과정에서 박스가 부서져 떨어져 나가고 안나는 꼬투리에서 분리된 완두콩알처럼 떨어져 내렸다. 안나는 자신이 마침내 분해 처리될 쓰레기가 된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컨베이어벨트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첫 번째 줄에서 안드로이드 중에서 쓸 만한 것이 골리고, 두 번째 줄에서 애완봇이, 세 번째 줄에서 산업봇이 AI봇들의 손에 추려졌다. 선별된 것들은 다시 형상별로 용도별로 벨트 옆 커다란 선반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작업하는 봇들은 표정이 없었다.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같은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

 

안나는 자신의 몸이 뭇 쓰레기에 묻혀 흘러가는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도무지 생각을 모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선별되기를 바라는 것인지, 그대로 쓰레기가 되어 분해되기를 바라는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안나의 번민과 상관없이 안나는 첫 번째 줄에서 이른 시간에 추려졌다. 외양이 깨끗하고 안나가 남아있는 에너지를 다 짜내어 고개를 든 순간 작업봇의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작업봇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봤다. 고개를 젓는 것도 봤다. 고개를 들지 않았어야 했나? 이제 번민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미 안나는 선별 수거된 봇이었다. 그곳에서 밤을 새운 안나는 세척실로 옮겨졌다. AI세척봇들이 안나의 몸에 세척제와 물을 뿌려 소년이 사정하고 안나가 미처 세척하지 못한 말라붙은 정액까지 씻어내고 소독한 뒤 건조기로 물기를 없앴다. 충전을 하고 다시 차에 태워진 안나는 중고봇 전시장으로 옮겨졌다.

 

한 남자가 안나를 샀다. 눈썹이 짙고 코가 오뚝한, 키가 크고 몸이 늘씬하게 균형 잡힌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었다. 그는 자신을 뮤지션이라고 소개했다. 밴드Q의 멤버이며 ‘커리어 우먼’이라는 여성전용 전자잡지 표지모델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의 잘생김과 그의 직업과 경력이 안나의 불안과 두려움과 후회와 자책감을 조금은 누그러트려 줬다. 그러나 그런 감상적이고 어설픈 판단이 안나 자신이 지닌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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