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연기를 포기한 후 승무원이 되었고,
창립 멤버로서 비행기 한 대를 띄웠고,
두 번째 비행기를 띄울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나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뜨거운 여름의 어느 날, 책을 고르러 서점에 갔다.
고른 책 앞장에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음속 깊이 밀려오는 거북함은 뭘까.
읽다 보니 가슴 한켠이 욱신 거리는 느낌이었다.
이미 마음속에서 사망선고를 내려버린,
저 깊이 묻어두었던 '연기'라는 것이 다시 살아나
‘나 안 보고 싶었어?’라며
살며시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이루어지지 못한 영원한 짝사랑.'
이라고나 해야 할까.
결말을 보고 싶어 끝까지 읽었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넘겨버렸다.
'나한텐 아름다운 과거를 회상할 여유 따윈 없어.'
내 현실세계에서는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고개를 휘저으며 밀려오는 감정들을 최대한 밀어내려 했다.
어찌 보면 세 번째 훈련.
두 번째 비행기 띄우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시작은 경쾌하지만은 않았다.
족히 500번은 넘게 외쳤을 멘트들을 500번이나 더 해야 한다니.
이전보다 적은 인원과 암울한 표정에 젖어있는 우리 덕에
아무래도 분위기가 조금은 가라앉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는 비상탈출 꼭 해봐야지?"
비상탈출 시험 당일,
구슬땀을 한 바가지 흘렸던 만큼
눈물도 한 바가지 흘렸던 우리를 지켜본 책임자 분은 새로운 시작에 앞서 응원의 말을 건네주셨다.
아직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신입이었던 내가
순식간에 경력자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훈련은 비행기가 없는 상황에서 시작되었기에
홍길동이 되어 이리저리 이동하며 훈련을 받던 와중이었다.
그리고 길어지는 훈련으로 하루가 유독 길게 느껴진 어느 퇴근길,
걸려온 한통의 전화
"예서씨, 작년에 같이 했던 감독님이 연락이 왔는데
예서씨랑 이번 작품에 같이 하고 싶어서 미팅 원한대요."
“작년에 000 작품 하셨던 감독님이요? “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작년에 단역으로 참여했던 작품에서 감독님께서 연락을 주신 것이었다.
내 연기생활 마지막 작품일 줄 알았는데.
더욱이 의외였던 건,
그 당시 연기를 마친 나에게
“너무너무 잘해줬어요.
다음번에 또 작품 있거나 맞는 역할 있으면 캐스팅 디렉터한테 많이 써달라고 얘기할게요.”
라고 얘기해 주셨던 감독님이셨기 때문이었다.
그냥 으레 지나가는 칭찬의 말이었겠지 싶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진짜로 약속을 지켜주셨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감독님 앞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번 계기를 통해서 더 잘 됐으면 좋겠네."
감독님은 나에게 함께 하자며 손을 내밀어 주셨고
그 유혹은 그 어떠한 유혹보다도 강렬했다.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일까.
하지만 아직 섣부르게 결정할 단계는 아닌 것 같아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경상도로 출장에서 귀가하던 퇴근길,
동료들과 웃으며 걸어가던 와중 걸려온 한통의 전화.
"일단 대본리딩이 잡혔어요. 근데 그 날짜가 좀..."
"왜요? 언제인데요?"
"예서씨가 절대로 안된다고 했던 날이랑 딱 겹치네요."
"아.. 저 그날은 비상탈출 시험이라서 절대 안 돼요.
한창 훈련 중이라 빠지면 안 되는데..."
"제가 어떻게 말씀드려도 이건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모두가 되고 예서씨만 안 되는 상황이라.
그럴 거면 퇴사를 하든지 이걸 선택하든지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시네요."
아, 시험을 목전에 앞두고 퇴사라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언제까지 결정해야 하는 건데요?"
"곧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오늘 내로는 대본리딩 참석여부를 말씀드려야 해서...
이런 걸 전하는 저희도 좀 마음이 무겁네요."
"잠깐만 전화 끊고 조금만 더 생각해 봐도 될까요...?"
나의 인생의 대소사를 몇 시간 안에 결정해야 한다니.
정말 지옥불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언니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봐."
비슷한 길을 걸어온 나의 동료는 나름의 명료한 답을 내려주었고,
나는 이윽고 전화를 걸었다.
"내일 가서 퇴사한다고 말씀드릴게요."
[작가의 말]
큰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마다 곱씹는 문장이 있다.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어.'
과거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기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매니저님께 토로했을 때,
매니저님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네가 여러 개를 할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뭐든 일정 수준 이상으로 노력하고 잘했기 때문인 것 같아.
내 주변에서 그렇게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름대로 잘 살더라.
그리고 어떠한 선택에 앞서 고민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너의 마음은 알고 있을지도 몰라.
네가 한 선택이 맞는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할 뿐이지.
뭘 선택할지를 생각하지 말고 그 선택이 맞는 이유를 찾아봐."
이 날, 중요한 기로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어떤 게 나에게 현실적으로 맞을지 생각하기보다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해 보았다.
가끔은 이성보다 감정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바로 이런 순간들이 아닐까.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두 가지의 마음가짐이었다.
'내가 한 선택이 최고라는 믿음'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결단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