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그만할래.”
나는 정식 훈련을 마친 승무원이다.
하지만 아직 승무원이 아니다.
나에게는 1기 승무원으로서
비행기를 띄우는 작업이 남아있었다.
그 이름은 '비상탈출시험'
비상시에 승객들의 탈출을 위해 15초 내에 슬라이드를 터뜨려야 하며,
비상착수 시에 6분 내로 승객들에게 안내를 해야 하고
기내의 화재 및 응급상황 발생 시에 사용하는 장비와 사용법들을 읊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들은 초기훈련에 어느 정도 포함이 되어있지만,
국토교통부와 항공사의 주요 인사진들 앞에서
비행 경험이 전무후무한 신입 승무원으로서 시험을 보아야 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이 시험을 위한 모든 과정들을 준비하는 데 한 달 남짓 걸렸다.
당시 우리는 예비조를 포함해 총 5개의 조가 준비를 했고,
당일 제비 뽑기를 통해 한 조를 제외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구조였다.
남은 한 조는 예비조로 다른 조를 도와야 했다.
우리 항공사의 첫 비행기가 한국 땅에 도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사심을 키웠던 만큼
시험 당일, 김포공항에 도착해 멋지고 늠름한 모습으로 있을 비행기를 생각하며
막중한 책임감만큼 너무나도 떨리는 순간이었다.
"자신 있습니까?"
비상장비를 만지작 거리며 중얼중얼 연습하고 있는 나에게 지나가는 선배님이 장난스레 물었다.
"네. 자신 있습니다. 뭐든 물어보십시오."
초기훈련 당시, 우수상을 수상했던 나는 자신감 넘치는 크고 똑 부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오늘이 드디어 나를 보여주는 날이야. 잘 마무리하고 이제 비행을 시작하자!'
어느 때보다 내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던 날.
그날은 내 생에 가장 슬픈 날 중에 하루가 되었다.
각 조의 막내가 제비 뽑기를 하러 나오라고 했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종종걸음으로 나갔던 막내는
제비 뽑기를 뽑자마자 눈과 입이 커지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두가 떨리는 마음으로
'제발 예비조만 되지 말아라.'
라고 외치던 순간이었다.
이유인즉슨, 예비조에 뽑히면 그다음 비행기를 위해 또다시 훈련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번 시험에서 끝내고 싶었다.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
챗GPT에게 8명의 조원들의 사주를 종합해
운명을 점지해 달라며 손을 모아 기도했던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의 손을 꼭 쥐고 계셨던 사무장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고,
조원들끼리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던 순간이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다 망한 것 같아요."
그냥 오늘의 운이 안 좋았을 뿐인데,
죄송하다며 펑펑 울던 막내로 인해
신입 승무원 3명은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것만 끝나면 비행일 줄 알았는데...’
‘제발 그만할래.‘
입사 이후로 훈련을 3번이나 받아야 한다니.
엄숙한 분위기를 떠나 책임감이 짓누르는 무게감이 얼마나 큰 지 체감했기에 비행은커녕 또다시 훈련에 들어가게 된 그 순간이 참으로 애석했다.
'우리 막내 손은 황금 손이야.'
오늘의 운세였다.
뽑기를 마치고 예비조가 되면 집으로 귀가할 줄 알았지만, 모든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른 조의 비상착수 상황을 도와주기 위해 수영장에 함께 가야 했다.
이동하는 버스 내에서 사무장님은
"괜찮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라고 우리를 다독이셨지만 이내 힘이 빠지시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막내의 죄책감이 얼마나 클지 정말이지 마음이 아팠다.
수영장에 이동해 약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열심히 훈련했던 모습들을 보여주는 동기들이 멋졌고
그 시험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한 편으로는 그들이 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고요한 외침이 있었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유독 칭찬을 많이 받았던 우리였기에 더 기대감에 차 있었던 걸까.
상황이 마무리된 후 앉아서 기다리는 우리에게
교관님은 가볍게 질문하셨다.
"지금 소감이 어때요?"
"저도... 저도... 잘할 수 있었는데..."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꾹꾹 눌러 담아도 밀려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세 명은 각자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서로를 등지고 울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처연해 보였다.
그날, 나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우는 모습이 물에 빠진 만두 같아 만들어진 별명.
‘물만두’
그렇게 마친 첫 비행기의 시험의 성공적 마무리와
시범조들의 비행 시작.
그리고 예비조의 차기 비행기 훈련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난 직감했다.
나에겐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작가의 말]
‘난 여기서의 운을 다한 것 같아.’
운에는 총량의 법칙이 적용될까?
돌이켜본 나의 삶에서 운이란 마치 그네와 같이
다가올 듯 말 듯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었다.
정말 중요한 일생일대기의 순간들에
미친듯한 노력과 함께 적당히 알맞게 운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가 달랐다.
까만 밤 아무도 없는 고속도로를 200킬로로 달리다
저 멀리 보이는 장애물에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직감이란 게 있지 않나.
상승이 있다면 하락구간이 있다는 걸 받아들일 시간 같았다.
그래서 나는,
잠시 운을 빌려온 시간을 지냈다고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