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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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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윤 Mar 09. 2020

소소한 투자 세밀한 상상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지만 눈에 보이면 나도 모르게 입장하고 있는 가게가 있다. 간판으로 찾을 때도 있고 유리창에 붙여진 스티커를 보고 들어갈 때도 있는 그곳은 복권 판매점이다. 방문에도 나름 규칙이 있다. 일주일에 여러 번 복권 판매점을 봐도 오천 원 이상은 사지 않는다. 낙첨이 되면 아깝다고 생각되지만 오천 원으로 당첨 번호를 맞춰보는 시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행복한 기다림으로 채울 수 있으니 합리화해본다.


일주일에 몇 번 소소한 투자를 통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다. 당첨금이 크면 클수록 하고 싶은 일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데 그중에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이사를 가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좋지만 더 쾌적하고 안전하며 아늑하고 개인적인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옮기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만족하지만 이사 가는 집은..


벌레가 등장하지 않는다. 사계절 상관없이 방충망과 창문을 제대로 닫았음에도 가끔 방에 벌레가 들어와 나를 반겼다. 육안으로 눈코입을 구분할 수 있는 크기의 벌레를 발견하거나 형체는 보이지 않는데 정체불명의 소리만 들리는 날에는 방을 나가든지 잠을 못 자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청소를 하다가 파삭하게 말라버린 껍데기와 마주칠 때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치우고 자리를 깨끗하게 닦고는 했는데 이제는 나만의 공간을 이름 모를 아무나와 나누지 않아도 된다.


채광과 전망이 좋다. 원래 살고 있던 집도 볕이 잘 들어왔다. 그래서 더 놓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나는 형광등보다 자연광을 더 선호한다. 햇볕이 따스하게, 오래, 잘 들어와서 여름의 긴 해와 겨울의 짧은 해를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채광이 좋은 집을 선택했다. 창문을 열면 나무들이 보인다. 변하는 계절을 눈으로 알 수 있다. 집에 들어오면 뒹굴거리며 쉬는 것도 좋지만 창가에 서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꾸만 밖을 보게 된다.


수압이 세고 뜨거운 물이 잘 나온다. 화장실과 부엌에서 동시에 물을 사용하면 한쪽 수압이 약해져서 난감했던 적이 있다. 보일러는 예열하는 시간이 꽤 필요한지 왼쪽으로 수도꼭지를 돌려놔도 뜨거운 물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원하는 온도가 될 때까지 쏟아지는 물이 너무 아까웠데 여기는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 수압도 시원해서 시간과 물, 둘 다 낭비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생활소음과 층간소음이 없다. 방음이 잘 되고 주변이 조용해서 다른 사람이 걷든지, 뛰든지, 소리를 지르든지, 볼륨을 크게 틀고 뭘 보는지, 누가 놀러 왔는지, 뭘 하는지 모를 수 있다. 외출 후 집으로 돌아와서 언제든지 고요하고 평온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각자의 방이 있다. 가족 개개인마다 마음껏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가족과 모여서 이야기하며 일상을 공유하는 일도 좋지만 개인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도 있는데 여기서는 각자의 공간에서 저마다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공간이 넓고 활용도가 높아서 부엌과 거실과 화장실을 이용하는데도 불편하지 않다.


통풍이 잘 돼서 창문을 열면 바람이 집 안을 휘젓듯 들어온다. 환기도 잘 되고 가끔 특유의 계절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울 때면 기분이 좋다.


대중교통이 잘 갖춰져 있다. 버스는 많이 지나다녔지만 애매한 위치에 정류장이 있었다. 건너기만 하면 되는 횡단보도 앞에서 버스를 놓쳤던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허탈한 마음을 가지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거나 급할 때면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야 했는데 이곳은 자주 이용하는 정류장도 가까이 있고 전철도 놓치면 바로 다음 전철을 타도 괜찮을 만큼 배차 간격도 촘촘하다.


생활 편의 시설이 가깝다. 마트, 백화점, 병원, 은행, 우체국, 카페, 식당, 영화관 등 편의 시설이 걸어서 15분 내에 위치해있다.


위의 조건과 더불어서 보안이 철저해 안전하고 주차 공간도 충분하고 간접흡연을 하지 않아도 되고 습하지 않아 곰팡이도 안 생기고 결로 현상도 없으며 부동산으로도 문제없는 등 온갖 좋은 조건은 다 갖춰진 아파트다. 오늘도 번호를 맞춰본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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