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 송원근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by 전하민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영화리뷰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쪼그라든 감을 카메라가 비친다. 이어 새벽 어스름이 깔린 단출한 방이 나온다. 실크 내복을 입은 할머니가 머리를 빗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분인 김복동 할머니다. 카메라를 든 이가 안부를 묻지만 김복동 할머니는 무심하게 대답한다. 그녀는 장롱 속 작은 보석함에서 팔찌와 반지를 꺼낸다. 외출 준비를 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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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의지를 가지고 한 일이라는 증거가 없다.’ 아베 총리가 한 말이다.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졌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정부 예산으로 10억 엔을 지급하고, 이번 발표를 통해 이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임을 확인한다.




일본은 사과한 걸까. 전쟁 중 위안부를 동원해 집단적으로 인권을 유린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을까. 최근의 경제 보복과 계속되는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미루어 짐작하자면, 당시 일본의 합의가 진정성 있는 사과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이유에서, 한미일 경제 공조나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 같은 것을 의식해서 사과 비슷한 것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10억엔을 건넸고, 그 돈은 화해치유재단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 쓰였다. 피해자들의 동의가 없는 화해와 치유는 얼마나 이상한가. 위 단체는 결국 해산되었다.





영화 <김복동>은 올해 1월에 돌아가신 위안부 피해자이자 평화운동가 김복동 할머니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그녀가 처음 일본을 고발했던 1992년 당시의 영상을 비롯하여, 아주 최근까지도 일본을 규탄하고 평화를 외쳤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위안부 문제를 막연히 '아픈 역사' 정도로 기억하고 있던 나에게, 당시의 피해자가 치열하게 삶을 이어가는 모습은 아주 낯설게 다가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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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며 느꼈던 건, 그리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경외심이다. 암 투병을 하는 동안에도 김복동 할머니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투쟁하는 삶을 통해 보여준 강인함과 유능함, 유머러스함과 인내는 아마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을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 열린책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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