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겨울의 하루는 길지만 나의 하루는 짧다. 내가 잠들고 일어나는 시간은 매번 제각각이다. 지난달부터 10평 남짓의 옥탑방에 혼자 살기 시작했다. 녹이 슬어 끽끽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끝없이 펼친 초록 정수리들이 한눈에 보인다. 다들 키가 고만고만한 주택 건물의 옥상이다.
바닥에 칠하는 방수제 때문이야.
처음에 누가 초록색이 눈도 편하고 좋겠다고 해서 지금까지 다 초록색이래.
일본도 그렇게 했었대.
라고, 언젠가 나래가 말해주었다.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나래는 그 밖에도 자잘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었다. 가령 로켓의 크기를 결정한 건 로켓을 발사대까지 운송하기 위해 뚫은 터널의 넓이라든지, 프린터 잉크가 샤넬 No.5 향수보다 리터당 2천 불 정도 더 비싸다는 것들을. 그런 사실을 어디서 알았냐고 물어보면 수줍게 웃으며 인터넷에서 봤다고 했다. 나래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도 잘했다. 막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 후줄근하고 말수가 적은 나에게 먼저 호감을 내비친 건 반장인 나래 밖에 없었다. 풋풋한 애정은 꾸준히 흘렀고, 다 크고 나서 우리는 서로를 지루한 학창 시절에서 건진 보물이라 여겼다.
올해 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베를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구하려는 참이었다. 사실 참이라기에 1년은 너무 길지만, 독일은 우리나라처럼 뭐든 빠르지는 않다. 인터넷 설치를 신청하면 3주가 지나야 사람이 온다. 통장을 개설하는 데에도 비슷한 시간이 소요된다. 소비자 입장에서 편한 건 아니지만, 그만큼 근로자에 대한 배려가 사회 전반에 깔려있다. 나는 그런 독일이 좋았고 계속 머물고 싶었다. 미학 전공자가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나라였고, 무엇보다 복지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는 혈안이 되어 돈을 벌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국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번에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신발 공장을 정리하며 새로 알게 된 것이 많았다. 먼저 공장이 있다고 다 부자는 아니라는 것. 우리나라는 사업자에게 대출을 정말 많이 해준다는 것. 그리고 친척들이라고 다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몇 달 동안 법원과 구청을 오가며 아버지의 유산은 아주 작게 쪼그라들었다. 당신이 사시던 허름한 옥탑방과 2천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이 나에게 남은 전부였다. 내가 더듬거리며 이런 자질구레한 가정사를 풀어놓자, 나래는 박수까지 치며 재밌게 들어주었다. 한국에 돌아온 걸 환영하자며 가진 둘의 조촐한 술자리는 그렇게 매주 이어졌고, 계절이 지나고 봄이 오자 그녀는 내가 사는 옥탑방으로 조금씩 짐을 옮겼다.
우리의 연인 됨을 기념하며 나래는 고급스러운 가죽 커버로 된 다이어리를 선물해주었다. 초록색이었다. 좀체 글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작은 손편지가 끼워진 그 다이어리를 보면 무언가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솟곤 했다. 커버의 색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래와 결혼했다. 내가 결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얼떨결에 하게 되었다고 하면 나래가 분명 속상해하겠지만, 그리고 나는 나래를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결혼식장의 풍경을 떠올리면 아직도 까마득하다. 화려한 한복이나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한 신부 측. 반대로 서로 얼굴도 잘 모른 채 드문드문 앉은 신랑 측 하객들. 그래도 연이 닿는 대로 모조리 연락했더니 내 쪽에 아주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이 일로 그녀는 친정과 조금 다툰 것 같았다. 하지만 깊게 묻지는 않았다.
요새는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장인의 소개로 꽤 괜찮은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보답하고 싶은 마음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어지럽게 섞인 채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 어느 때보다 책을 많이 읽는다. 어쩔 때는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나래와 아이를 가지고 싶어 노력하는데 잘되지 않는다. 서로 추궁하기 싫어 아직 병원에 가보지는 않았고 대신 담배를 끊었다.
내년이면 불혹이다. 이만큼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아직 내가 한없이 어리게 느껴진다. 이룬 것은 볼품없고 나는 점점 고집불통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래는 검사직을 그만두고 대형 로펌으로 들어갔다. 이 일로 우리는 몇 차례 심하게 다투었다.
어제는 같이 골프를 배우자는 나래에게 모진 말을 던졌다. 그녀는 골프가 정말 좋은 스포츠라며 우선 스크린 골프레슨부터 등록하자고 했다. 나는 딱 잘라 반대했다. 탁 트인 초록색 잔디 위를 걷다 보면 마음이 안정된다는 연수원 선배 말이 좋게 들리냐고, 그거 다 부도덕한 사람들이 같이 못된 짓 하려는 속셈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골프를 좋아하는 장인 장모 생각이 나서 그랬는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짐을 싸서 친정에 갔다.
지인의 권유로 투자한 주식이 많이 떨어졌다. 우리 부부가 그간 모은 돈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그 일로 나래와 나는 완전히 갈라섰는데, 사실 우리 관계는 몇 년 전부터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이 가족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튼 난 정교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혼남이 되었고 두어 달 만에 체중이 20kg나 불었다. 먹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요새는 배가 불러도 허기가 좀체 가시지 않는다. 식사를 하고 꼭 소화제를 먹는 습관이 생겼다.
작년에 심장 수술을 몇 차례 받았다. 고지혈증과 겹쳐 쉽지 않은 수술이었지만, 운이 좋아 급한 불은 껐다. 퇴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래에게 문자가 왔다. 장인의 장례식에서 그녀를 거의 4년 만에 만났는데, 몰라보게 핼쑥해진 얼굴을 보고 나는 심장이 덜컹했다. 그런데 그녀는 나보다 더 놀란 모양이었다. 내 불룩 나온 배를 장난스럽게 퉁퉁 치더니 별안간 안겨 한참을 울었다.
나래와 다시 만난다. 교외에 작은 주택을 짓고 거기서 같이 산다. 처음에는 세상의 끝에 온 기분, 인생이 끝나버린 기분에 우울한 순간이 많았지만, 언젠가부터 마음 한쪽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먹는 것도 많이 변했다. 거의 완전한 채식주의 식단을 따르고 있고 체중도 정상을 유지하고 있다. 예전에 먹던 온갖 약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래와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하루의 주된 일과다.
나는 어쩌면 이런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해야 할 일이 없는 상태, 먹고 숨 쉬는 것으로 충분한 마음, 세상에 대한 기대도 원망도 없는 달콤한 나태, 옳고 그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