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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하민 Mar 06. 2022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한남동과 네 번의 기지개 (프롤로그)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 최승자, <봄> 中


하지만 봄이 온다고 반드시 새순이 돋는 것은 아니다. 겨우내 얼었던 흙을 뚫고, 새로운 가지가 양 옆으로 위로 뻗어나가려면 힘이 필요하다. 기지개를 켜야 한다. 지난겨울 동안 회사와 집, 두 공간만을 반복해서 오갔다. 재택근무를 할 때는 눈 뜨자마자 일을 시작해서 일이 끝나자마자 잠들기도 했다. 춥다는 핑계로 달리기도 거의 하지 않았고, 무릎이 다쳤다는 핑계로 요가도 걸렀다. 미술이나 전시, 그밖에 향유할만한 것에도 관심을 뚝 끊었다. 거의 일만 하고 종종 술을 마셨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운동을 빼먹거나 전시를 보지 않는다고 당장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건 조용히 쌓여가는 카드 할부액처럼, 언젠가는 내가 안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될 터였다. 그래서 뭐라도 하기로 했다. 마치 기지개를 켜듯이.


운명을 별로 믿는 편은 아니지만, 이게 그저 우연은 아닐 거라고 분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나의 직장 상사임과 동시에 독특하고 총명해서 닮고 싶은 어느 형으로부터 '숨 쉬는 고래'라는 요가 유튜브를 추천받은 적이 있다. 보고 마음에 들었다. 영상을 틀어놓고 부진 선생님의 가이드에 맞춰 팔다리를 이리 비틀고 저리 뻗치다 보면, 몸이 풀릴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자주 보고 따라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촬영의 배경이 되는 요가 스튜디오에서 오프라인 수업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고정 멤버로만 진행되는 다소 특이한 방식이었다. 한남동에 위치한 탓에 집에서 한 시간 반 가까이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요가하는 시간과 왕복 대중교통 이용시간을 합치면 토요일 하루를 거의 다 쓰는 셈이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 몰라 망설였지만, 그래도 친숙하고 정이 가는 그 흰색 방에 직접 앉아서 아사나를 하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산뜻해졌다. 그래서 신청했고, 어제가 바로 첫 수업이었다.



갔더니, 맙소사. 입구가 낯설지 않았다. 분명 와본 적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수년 전, 친구들과의 약속시간이 조금 남아 이태원 근처를 혼자 배회하던 중에 우연히 입구를 기웃거린 곳이었다. '수련 중'이라는 문구가 붙은 단정한 문이 살짝 열려있었고, 안에서 옅은 향 냄새가 났다. 그때는 당연히 요가를 하기 전이고 관심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데에서 주말에 요가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싶었다. 이태원 한복판에, 메이드 클럽과 현대카드 라이브러리를 곁에 둔 요가 스튜디오라니. 참 이상한 사람들이구만. 그런데 그게 바로 내가 될 줄이야. 그것도 귀한 토요일, 굳이 한 시간 넘게 빨간 버스를 타고 한남동까지 와서 요가라니.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주사위에 적힌 숫자가 효율적인 시간 사용을 의미한다면 숫자는 아마 2나 3쯤 되려나. 좀 더 시간을 잘 쓰고 싶었다. 이런 고민을 지인 Y에게 나누니, 그녀는 주사위를 하나 더 던져보라고 했다. (실제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의미로) Y는 한남동에 괜찮은 갤러리를 추천해줄 테니, 매주 하나씩 가보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다녀와서 그날의 감상을 글로 정리해보라고. 그러면 토요일이 더 풍성해지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래서 한번 해보기로 했다.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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