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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온 May 30. 2022

불면일기(不眠日記)

22.05.30 열세번째

안녕하세요 일기씨, 무려 세 달만의 일기입니다.


그동안 잠을 잘 잤느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놀랍게도 잘 잤어요, 라고 답 할 수 있다. 세 달 사이 이사를 하고, 잠자리에는 매트리스와 암막 커튼이 사라졌는데 이것이 매일 밤 늦지 않은 잠을 가져다 줄 것이란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다들 낯선 집에서 잠은 잘 오냐고 물어보는데 전보다 훨씬 잘 자고 있다고 말하면 놀란다. 부모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면 왠지 서운해하실 지도 모르니까, 아직까지는 그들에게만큼은 비밀아닌 비밀이다.


새로운 보금자리의 창문으로 따스한 햇빛이 예쁘게 들어온다.

그래서 전에도 종종 즐겼던 낮잠을 이곳에서는 훨씬 더 따뜻하게 맞이한다. 아직까지는 백수라 이런 햇빛을 맞으며 낮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전에는 낮잠을 자고 난 날이면 절대 밤에 잠을 못잤는데, 이렇게 낮잠을 자고도 밤에 잠이 잘 온다. 가끔은 안올 때도 있지만 전에 잠 못이루며 결국 새벽빛을 보고야 말았을 때와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잠이 잘 오니, 그동안 새벽 시간을 채워주던 책도 영화와도 거리를 벌려왔는데 그래도 요즘 재밌게 보고 읽은 것이 없진 않다.


최근에 단번에 엔딩크레딧을 본 영화 <남색대문>


영화 마지막 즈음 주인공 커로우의 나레이션이 좋았다.


왠지 이 영화를 본 뒤로 주택가를 지나갈 때면 남색 대문을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을 시하오를 상상한다.

영화 속에선 시하오가 커로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커로우가 시하오를 바라보는 마음도 일종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마음의 결이 이 두 명의 관계처럼 미묘하게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조차 두 명의 마음이 맞아 서로가 원하는 관계를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생각보다 적다.


사랑과 관계. 이 두 단어는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단어들이다.


사실 요즘 잠을 잘 잔 이유는…내가 잠으로 도망치는 사람이어서이다. 이전에도 이 일기에 고백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불면일기는 어떻게 보면 그 날 하루를 내가 어느 것에 상처 받거나 슬프지 않은 채 마무리하고 있어서 쓸 수 있었다. 아니면 그 정도가 가볍거나.


꽤 오래 전부터 전구 퓨즈 나가듯 잠드는 날이면, 그건 정말 육체적으로 피곤한 날이기도 했고

밖에서 사람 때문에 힘들었다고 생각했던 날이었다. 혹은 힘든지도 몰랐는데 내가 꼴까닥 잠들고 그 다음 날이 되서야 혹시…나 그 일이 스트레스였을지도…?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대체로 내 마음의 상태로 잘 몰라서, 몸의 변화로 이상을 알아채는 사람이다.


아무튼 이사를 하고 나서 나는 전보다 잠을 잘 자고, 더 많은 것을 잊고 있다.


요즘 ‘일상이 되게 꿈 같네…’라는 생각을 자주 하기는 했는데, 정말 최근에 가까운 사람한테 내가 평소 자주 잊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아서 그 날의 슬픔이 꽤 오래 갔다. 정말 내가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것들, 그들과 나누었던 대화, 내가 그들에게 한 말, 과거의 추억들 이런 걸 대부분 기억하고 못하는 건 사실이라 정말 할 말이 오래 전부터 없었다. 단적인 예로 생일을 잘 기억못해서 정말 스스로 스트레스이기도 했다.


이렇게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건, 스스로 내가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인가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조차도. 그렇다면 나는 나만 생각하는 사람인가, 내가 지금까지 세상과 타인과 나누려고 했던 사랑의 온기는 거짓된 온기였던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 아니 빠지려고 하면 도망치듯 잠에 들었던 나날을 보냈다. 잠을 잘 자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게 뭐람. 오히려 밤 지새우던 나날의 내가 훨씬 더 단순하고 밝은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

이렇게 쉽게 단언하면 안되겠지만.


아무튼 일종의 결론을 내려봤는데, 이건 아직 정리 중이라 글로 옮기면 더욱 난잡해진다. 언젠가 꼭 정리해서 글로 써볼 수 있기를.


다행히 대충 결론을 내리고, 나는 그런 사람이야 대강 정의를 내려주자 마음이 조금은 전보다 편해졌다.


요즘은 다시 전처럼 보다 가벼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글에서나, 태도에서나, 이것저것


오늘은 사울 레이터의 전시와 그의 삶 일부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왔다. 영상 속 그의 말과 전시관 속 몇 점의 사진 덕에 나는 오늘 대체로 행복했고, 함부로 위로 받았다.


불면일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밤의 시간을 길고 길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마음은 간사하게도 그 시간을 또 그리워한다. 다음엔 어떤 마음으로 돌아올지 과연…




오늘의 추천곡

https://music.youtube.com/watch?v=aZVdiGR9XAw&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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