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가 없어졌다.

by 진지우기

어느 날 현관문 앞에 놓여있던 세탁기가 사라졌다. 한동안 비어있던 옆 방의 불이 켜져 있었고 바닥에 끌린 자국은 옆집이 범인이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너무나 어이가 없는 행동에 화가 나서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반 지하 생활에서 세탁기는 매우 중요하다. 아파트 구조와 달리 베란다나 다용도 실이 없는 반 지하에서 세탁기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다. 보통 월세가 싼 집들은 세탁기를 놓을 공간이 없는 경우가 많다. 여러 날 발품을 팔아 세탁기를 놓을 수 있는 지금 방을 구했다. 현관문 앞 수도꼭지와 1.5평의 공간. 밖이지만 세탁기를 놓을 수 있었다. 주인도 이런 점을 알고 방세를 올리려고 했지만 긴 협상 끝에 원래 가격으로 합의를 받아내었다.


구조적으로 내가 거주하는 이 빌라는 2세대가 반 지하이고 집 문 앞에 세탁기 한대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다행히 옆 집은 비어있었으므로 그 한자리를 내가 선점할 수 있었다. 이사하는 날 중고 세탁기를 샀다. 세탁기를 힘들게 옮기고, 전기 설치, 수도 설치, 수평까지 잡느라 몸이 고생을 했지만 내 세탁기가 생겼다는 기쁨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기쁨을 가져가다니... 아니 훔쳐간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이런 몰상식한 짓을 하는 걸까?


몇 차례 문을 두드렸다. 곧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등 뒤로 내 세탁기가 보였다. 그 남자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수도와 전기를 연결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 광경을 보자 더 어이가 없어 짜증 섞인 말들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남자는 어리둥절해하며 어색한 한국말로 천천히 말해달라고 했다. 외국사람이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사건을 해결해야 했으므로 몸을 써가며 밖에 놓여 있던 세탁기는 내 것이라 말했다. 남자는 어눌한 한국말로 주인이 자기에게 주었다고 말했다. 아... 이 부부는 반 지하 집주인들의 말도 안 되는 논리에 속았구나. 반 지하 주인들에게 세탁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대답들이 참 가관이다. 사람도 들어가기 힘든 엄청 좁은 화장실임에도 ‘전에 살던 사람은 놨다.’라며 말도 안 되는 공간지각 능력을 보여주는 주인들. ‘그건 나도 모른다.’라며 그나마 양심적으로 대하는 주인들 혹은 ‘젊은 사람이 손빨래하면 되지 무슨 세탁기냐’ 하며 혼내는 주인들도 있다.


우리 집주인은 세탁기를 물어보는 외국인 부부에게 옆집과 함께 쓰면 된다는 식의 말을 했을 것이며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외국인 부부는 세탁기를 덤으로 준다고 오해하여 기쁨 마음에 계약을 했을 것이다. 한국 사람 인심에 많이 감동했겠지만 이사 온 첫날 그 감동은 깨졌다.


못 알아들었을까 봐 내 거라고 몇 차례 강조했다. 그는 확실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세탁기를 빼앗긴 그의 아내는 앞으로 빨래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걱정 때문인지 모진 타국 생활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걱정되는 듯 표정이 어두웠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 그들에게 서로 교대로 쓰자고 제안했다. 전기는 내 방에서 끌어오는 것이 편하니 전기세는 내가 내겠다고 했고, 세제는 각자 걸로 쓰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다행이라는 듯 한결 밝은 표정을 보였다.


그 뒤로 그 부부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그 부부가 빨래를 하고 나면 세탁기 안에 잔뜩 남은 돌가루와 모래가루로 그들의 일이 고되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자연스레 그들의 흙모래가 내 옷에도 묻어나기 시작했다. 짜증도 났지만 나도 그들처럼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보통의 길을 걷지 않았던 나도 누군가에게는 낯설게 보였고 항상 그런 시선을 받아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이방인의 삶. 반 지하의 삶의 고됨과 불안을 누구보다 알기에 돌가루에 대해 뭐라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되었을까 주말 아침 옆집이 소란스러웠다. 나가보니 이사를 가는 중이었다. 남편은 화가 난 듯 무언가 씩씩거리며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달라고 요구했고 집주인은 못 알아듣는 남편에게 계속 한국말로 계좌로 이체해주겠다고 했다. 부인은 낯선 곳에서 또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이 두려운 듯 힘없이 짐을 옮기고 있었다.


아마도 말이 통하지 않아 그들이 이해하던 조건과 집주인이 말했던 조건이 달랐던 것 같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말했다며 이해 못한 당신들의 잘못을 강조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야 한다는 흔한 자기 방어 논리를 펼치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는 트럭을 보며 로마에 온 외국인에 대한 법은 없을까 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있겠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외국인에게 그런 법이 있다는 걸 설명이나 해줄까? 글쎄. 우리 집주인은 안 해 줄 것 같다.


이제 빨래에서 돌가루가 나오진 않는다. 그래도 빨래를 돌리면 그 부부가 생각난다. 잘 지내고 있을까? 이사 간 집에선 그들의 세탁기를 샀을까? 그 세탁기에는 아직도 돌가루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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