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지하 이야기를 읽어준 당신에게

by 진지우기

장르문학의 거장 스티븐 킹은 작가의 삶과 생각을 담은 <유혹하는 글쓰기> 책에서 글쓰기는 시간을 초월한 ‘정신감응’이라고 말했다. 글은 시공의 영향을 받지 않고 누군가와 정신적으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1999년 12월 아침 글을 쓰고 있는 자신과 자녀들, 텔레비전 소리 등 집안 풍경을 묘사했다. 내가 그 글을 읽은 것은 2019년 저녁이었고, 스티븐 킹과 나 사이엔 10년이란 시간과 너무나 먼 거리가 있었지만 교감하고 있었다.


글이라는 것은 이런 강력한 힘이 있다. 이제 그 강력한 힘을 최대한 끌어내어 당신과 생생한 정신감응을 시도해보려 한다. 이 마지막 챕터를 쓰는 목적은 바로 당신이다. 이 글을 읽어주는 당신.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나의 가족이나 친구 일 수 있고, 사랑하는 H 일 수도 있다. 혹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내 자녀가 될 수 있고 혹은 나이를 먹은 ‘나’ 일 수 있다. 당신이 누구일지 지금의 나는 모르겠지만 내 글을 읽는 지금 순간을 통해 내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15편의 글을 읽어준 당신을 위해 내가 전하고 싶은 첫 번째 마음은 감사다. 15편의 이야기는 엄청난 성공담이나 지식이 가득한 이론서가 아닌 볼품없는 반 지하와 그곳에 사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의든 타의든 당신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것은 당신의 시간을 나한테 주었다는 이야기다. 이 글은 그 시간에 대한 나의 감사다.


두 번째 전하고 싶은 마음은 부끄러움이다. 딱히 자랑스러운 부분도, 딱히 아름다운 부분도, 딱히 희망적인 부분도 없는 자칫 가난한 자의 자기혐오와 애정결핍처럼 보이는 글을 내놓으니 참 부끄러웠다. 하지만 내가 한발 나아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었다.


예전에 감기 몸살 때문에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중요한 일이 있어 감기를 빨리 나아야만 했기에 감기 몸살 기운이 느껴지자 마자 병원에 갔다. 빨리 낫게 해 달라는 젊은이에게 연세가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덤덤히 말했다.


“감기가 나으려면 아파야 합니다. 그래야 나아요. 아픈 과정 없이 바로 나을 순 없어요.”


당신이 읽었던 다소 불편하거나 안쓰러웠던 15편의 글은 나의 ‘몸살’이자 병실에 입원해 씻지도 못하고 주사와 약에 찌들어 축 쳐진 ‘얼굴’이었다. 이런 불편한 모습을 굳이 보여주었던 이유는 낫기 위해서였다. 경제적 가난의 문제가 ‘마음’의 가난으로 이어지고,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반 지하와 동일시 하기 시작했기에 이런 내적인 상황을 바꿔야 했다. 시린 겨울을 이겨내는 봄의 새싹 같은 기운이 내 마음 안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깨닫기 위해, 거지 같은 하루이건 대단한 하루이건 모든 하루에서 배울 것은 있으며 내 영혼이 별을 볼 수 있다면 어떤 시련도 견뎌낼 수 있음을 깨닫기 위해 글을 썼다.


세 번째로 전하고 싶은 것은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그간의 글들은 반 지하 생활을 ‘아프니까 청춘이다.’처럼 고통을 낭만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 인생은 고통을 이겨내고 성취하는 성공스토리가 되어야 하거나, 로또 당첨과 같은 한방의 역전 스토리도 아니다. 인간은 고등 침팬지 이상의 그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며 그 능력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선택의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어떤 선택들이 나의 현재 상황을 만들었는지 고찰해보고,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나가야 할지 기준을 다시 세워보는 사색의 시간인 것이다.


좋은 선택인지 나쁜 선택인지 판단할 필요도 후회할 필요도 없다. 우린 선택해왔고, 앞으로 선택해갈 것이라는 사실만이 진실이다. 몸살을 앓기 한 나의 선택과 내 몸살을 읽기로 한 당신의 선택이 만나 지금 이 순간을 창조할 뿐이다. 그리고 이 선택들이 쌓이며 당신과 나의 감정이 생겼다.


과거엔 자신 만의 철학과 의미를 통해 고유한 선택을 해온 사람들을 위대하게 평가했다. 하지만 요즘엔 선택의 고유함보다 선택의 기댓값을 더 높게 평가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는 높은 가치를 만드는 자가 더 많은 재화를 벌기 때문이다. 가치 중심주의 현대사회에선 자신만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고유함보다 선택으로 인한 결과의 가치가 인정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할 때 망설이거나 누군가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안타까운 현상은 그 선택들의 결과까지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과가 만족스럽거나 사회적 지위를 높여줄 땐 문제가 없지만 내가 겪었던 정체성의 문제처럼 만족감도 낮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지 못했을 때는 자기혐오, 불안, 우울, 성장 제한, 비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당신과 나는 시간, 나이, 국적, 빈부, 종교의 차이를 넘는 존재론 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오직 선택만 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고유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선택들로 정체성이 생겨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선택은 영원불멸하는 절대 법칙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자라나는 나뭇가지처럼 풍성해지는 것이다.


고로 지금까지 해왔던 선택이 잘못되었다 해도 지금 이 순간부터 다른 선택을 하면 된다. 반대로 지금까지 잘 선택해왔다가 최근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한다면 다시 예전처럼 선택하면 된다. 그 선택의 결과를 지금의 자신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와 그 무한의 능력을 깨닫고 살아간다면 우린 풍성한 나무가 될 것이다.


열매가 중요한 자들에겐 상품가치가 높은 열매를 최단시간에 최대한 얻는 것이 그들의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풍부한 나무가 되어 꽃과 열매뿐 아니라 두껍고 튼튼한 가지에 그네 줄을 매어 아이들을 웃게 하고 싶다. 땡볕 아래 힘든 노동에 지친 사람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무더위에도 시원한 바람은 언제나 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다.


어떤 선택이 좋은 선택인지, 잘못된 선택인지 판단하지 마라. 단지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유에 감사해하며 나는 나 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진정 원하는 선택을 하는 것에 집중하자.


15편의 몸살은 내 해왔던 선택들에 대한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했던 선택했던 생각은 이랬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명성과 부를 쌓은 사람만이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다.’ 겉으로는 아닌 척, 예술가인척, 숭고하고 고고한 척, 했지만 그 누구보다 돈을 원했고 돈을 혐오했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매일 남모르게 나를 비난하고 혐오하며 살아왔다. 이젠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몸살은 필수였다.


글의 소재로 ‘반 지하’를 선택한 것은 작가로서 최악의 선택일 수 있다. 아마 요즘 인기 있는 ‘주식’, ’ 부동산’, ‘동기부여’, ‘로맨스’, ‘힐링’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목적은 그동안 내가 선택해 스스로 만든 고정관념과 자기혐오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는 것임으로 가장 큰 문제이자 두려움인 ‘반 지하’를 선택했다. 선택의 결과는 받아들이면 될 뿐 그 효율성이나 결과에 대해선 중요하지 않다. 결과가 좋지 않거나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다시 선택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제 반 지하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의 다른 면들도 많으니 그것들을 꺼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시 나의 새로운 선택이다.


그간 반 지하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어준 당신의 선택에 깊은 감사와 포옹을 전한다. 부디 나의 잘못된 선택들을 통해 당신의 선택은 더 당신 다운 방향으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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