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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지우기 Nov 17. 2021

9, 19, 29 그리고 39살이 되서야 깨달은 것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선택은 유치원 때 하원 버스를 타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걸어서 집에 혼자 갔다. 내가 없다는 걸 뒤늦게 안 유치원은 발칵 뒤집혔고 날 찾지 못해 사색이 된 얼굴로 찾아온 선생님은 태연하게 거실에서 놀고 있는 나를 보며 놀랐다. 땀 때문에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과 눈물로 범벅이 된 선생님의 얼굴을 보며 내가 무언가 잘못했음 느꼈다. 내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는 지옥을 걸을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배웠던 사건이었다.


9살 때 했던 선택은 오른손을 든 일이었다. 숙제를 안 해온 사람은 솔직하게 손을 들어보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이들 사이로 오른손을 들었다. 그렇게 손을 든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담임 선생님은 나를 앞으로 불러냈다. 걸어 나가며 내 선택에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기차는 떠났다. 혼자 혼날 줄 알았지만 담임 선생님은 친구들 앞에서 어린이가 가져야 할 진실함에 대해 긴 연설을 했고 중간중간 그 증거로 나를 가리켰다. 그 선택은 성인 된 지금까지 내가 괜찮은 놈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다. 


19살 때는 정말 중요한 선택을 했다. 고2까지 진로에 대해서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던 내가 돌연 연극영화과를 진학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 당시 우연히 들어간 연극부 활동이 너무 재미있었고, 공부는 너무 싫었다. 그 당시 재미는 나에게 매우 중요한 선택 기준이었다. 안타깝게도 지능은 현저히 낮아서 이 결정이 앞으로 내 인생의 몇십 년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인지까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지 장기적으로 괜찮은 선택인지 나보다 똑똑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못했다. 그저 재미있으면 장땡이었다.


29살. 아... 내 인생 최악의 선택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발했던 시기이다. 월드컵 경기에서 훌륭한 선수들을 모두 강퇴시켜버리는 최악의 심판이랄까? 아무튼 정말 최악이었다. 불투명한 앞날과 29살이라는 숫자가 주는 위압감에 눌려버렸고 거친 연극판에서 혼자 살아갈 용기가 없었다. 두려웠다. 


내 '두려움'을 해결하는 게 급했다. 너무 순진했고, 너무 무식했고, 심지어 내가 똑똑하다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신생극단에 덜컥 입단했다.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어떤 공연을 만드는지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저 두려움만을 해소하기 위해 들어갔다. 당연히 사람들과 섞이지 못했고, 자잘한 마찰과 소음만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예술에 대한 내 열정과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결국 10년 넘게 했던 연극을 그만두었다.


어느덧 10년이 흘렀고 두 달 뒤면 39살이다. 유치원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할 수 없고, 19살처럼 재미로 선택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29살 때처럼 두려움으로 인한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기도 싫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노라니 두려움과 조바심이 뒤섞이며 이상 증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언가 계획하고 선택하는 순간이 오면 내 머릿속 모니터에 이런 메시지가 뜬다.


'시스템 과부하. error, error, error...'



프리랜서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스케줄 조율인데 한 해, 한 달 계획을 짜는 것은 당연히 안되고, 일주일 단위의 스케줄을 계획하는 것이 국가 단위의 예산 짜는 것만큼 어려워진다. 요즘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내 의사결정 능력은 내 나이와 정비례하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내 찾은 나의 문제는 아래 문장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우주를 향해 간절히 기도하면, 네가 원하는 뭐든 할 수 있다." 


나는 이 말이 정말 정말 위험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자기 계발 덕후로써 몇 년간 신봉했던 말이지만 나 같은 의사결정 능력이 최악인 이들에게 '뭐든'이라는 말은 '블랙홀'과 같은 말이다. 블랙홀은 잘만 사용하면 차원을 넘는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지만, 나처럼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은 빨아드려 흔적도 없이 모든 것을 분해해버린다. '뭐든'이라는 말은 무한한 가능성인 동시에 무한한 혼돈을 가지고 있다. 올바른 선택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만이 사용하는 무기다. 안타깝게도 내게는 그런 무한한 가능성을 통제할 능력 따윈 없다.


내 글쓰기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면 내가 얼마가 우유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처음 글을 쓸 때 프로그램 선택부터 난관이었다. 한컴, 구글독스, 워드(마소), 페이지(애플)에 쓸지 선택지가 너무 많아 어떤 게 가장 좋은지 알아보다가 그날 쓰기로 했던 글쓰기 분량을 못 채웠다. 겨우 겨우 선택을 했지만 그다음이 더 힘들었다. 쓴 글을 어디에 올릴 것인가? 유명 블로그(네이버), 약간 유명 블로그(다음)?, 워드프레스? 브런치? 아니면 개인 홈페이지? 선택지가 너무 많아 고민하며 며칠을 낭비했다.


이런 선택 장애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중에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 고를 수 있다는 믿음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나는 자주 혼돈에 빠진다. 그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혼돈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다. 


경주마에게 씌우는 차 안대를 아는가? 말의 시야각은 인간보다 넓은데 경주마에겐 앞만 보면 되므로 차 안대를 씌워 경기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차 안막이 필요하다. 그래서 요즘엔 선택의 폭을 줄이는 것에 집중한다. 무조건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만 그래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 2개 정도의 선택지만 제공한다.


글 쓰는 프로그램은 아직도 선택 못했고, (보시다시피) 플랫폼은 브런치로 선택했다. 책은 리뷰를 보지 않고 바로 사고, 전자기기의 경우 선택지가 너무 많음으로 애플 제품군으로만 산다. 옷은 2년째 안 사고 있다. 그리고 물건의 경우 책을 제외하곤 무언가를 사면 비슷한 기능의 무언가는 버린다. 이건 습관이자 내 삶의 원칙이 되었다. 내가 나중에 자식을 낳는다면 꼭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원하는 뭐든 될 순 없어. 넌 이 세상 모든 것을 만질 수도, 먹을 수도, 입을 수도, 가질 수 없으니까... 대신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딱 두 개까진 괜찮아. 팔, 다리, 눈, 귀가 왜 두 개 인지 아니? 두 개 그 이상은 가지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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