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아프지만 처음으로 돌려놓는 일

기어이 알아차린 이별.

by 류안

그의 이야기는 귀를 막고 싶어도 들려오고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나를 흔들고 있습니다. 부디 이 글을 마칠 때쯤이면 이제 더 이상 그의 이야기에도, 그림자에도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이라 기대하며 글을 열어봅니다.


그에게 쌓이고 쌓인 서운함이 표정으로 드러나 차마 숨길 수 없던 어두운 마음. 그것이 그로 하여금 나를 피하고 멀리하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였음을 깨달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어요.


오늘, 그는 나의 미소에 환하게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미소가 밝네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이별했음을 실감했습니다.

나는 이제 그 앞에서 서운함을 가득 담은 표정을 지을 필요도, 이유도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는 그런 나를 사회적으로 대할 수 있는 숙련된 사람이니까요.


지난여름. 이미 예견된 이별을 거하게 치르고서도 그를 놓지 못했습니다.

그의 안부, 그의 몸짓, 그의 음성, 그의 눈빛, 그의 포옹, 그의 존재 자체가 수십 개월 내 일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시간을 쉽사리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겪고 싶지 않은 친자식과의 단절, 안정적인 주거환경에 대한 위협 이 두 가지로도 충분히 일상 속의 지옥을 맛보던 시기에 그와의 시간은 나를 숨 쉬게 했으니까요. 둘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위안, 둘이라서 가능했던 시간, 종종 입을 틀어막아야 했던 감정.


해보지 못한 마약이 이런 것일까. 마약에 취한 듯 술에 취한 듯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사랑에 빠져있던 순간들이 모두 중독이었음을... 정신 차리려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들었던 사랑. 그때 주고받은 밀어들은 이제 허공에 흩어진 먼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때마다 더 또렷이 떠오르는 그의 존재가. 우리의 불균형한 관계가 나를 얼마나 지배했었던지. 이런 마음은 불안과 초조함을 동반했기에 그는 종종 자유롭고 싶어 했습니다. 내가 이해하고 인정하는 그의 속성. 구속받지 않고 싶고 자유, 집착을 불경스럽게 여기는, 내가 생각하는 자유 그 이상을 원하는 모습에 참 많이도 속을 앓고 울던 밤들이 있었어요. 이해를 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그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던 나의 사랑 방식이 그에게는 구속이, 집착이 되어버렸습니다.


몇 해 전 한 여름의 뜨겁던 오후, 몇 주만의 재회를 앞두고 스케줄을 취소한 그의 통보. 그의 무디고 더딘 마음에 속상함을 쏟아낸 나에게... 그는 한때 용광로처럼 뜨거웠던 만큼 죽도록 매정했습니다. 그가 이별을 말하기 전까지 내가 서운함을 견디지 못해 몇 번을 내뱉었던 탓에 나는 오히려 죄인이 된 것 같은 죄책감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이별 통보 문자에 손과 심장이, 입술과 다리가 바들바들 떨린 탓에 일시적인 급성 두통까지 겪게 되니 그가 참 원망스러웠지요.


나는 이혼 후 외상을 견뎌내면서 건강한 관계. 건강한 사랑을 얼마나 추구했던지.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글도 수십 차례 쓰면서 꿈꾸었던 이상과는 적확하게 반대급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도피처. 내가 숨을 곳. 온갖 풍파를 막아주던 큰 날개. 차라리 그것뿐이었어요. 나의 회복적인 여정에 큰 소나기를 피해 갈 수 있게 품어줬던 사람. 그것뿐이라고 받아들여야 했어요.


여름 이후, 가을. 겨울은 이별을 준비하기 위한 더 독한 사랑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더 갈망하고 애틋하게 그리워했고 이별을 철회하고 서로를 다시 품었습니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예견된 이별의 그림자는 재회의 농도가 진해질수록 더 짙게 드리워져 점점 더 큰 균열을 만들어 내었고...

빙하가 양 갈래로 갈라지듯이 무서운 속도로 쩍쩍. 굉음을 내며 둘 사이는 멀어져 갔습니다. 한쪽과 또 다른 반대편에서 서로 손짓하거나 발버둥을 쳐도 이미 벌어진 간극은 우리를 제대로 갈라놓았습니다.


받아들임.


내가 그에게 어떤 위안을 주었든 간에. 그가 나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건 간에. 이미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을지". 그것까지는 아직 체화가 되지 않았네요. 붙잡을 수 없는 바람의 속성처럼. 그래요. 우리는 기어이 다시 혹은 결국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독주를 들이붓듯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부었던 그의 마지막 이별 통보는 충분히 나를 각성시켰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치명적일 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지던 그의 중독에 마침내 취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와의 이별. 그 공백을 채워보려 괜히 이곳저곳을 기울이고, 이 마음 저 마음 건드려 맛보기도 했던 이기적인 마음도 이제 명확히 선긋기가 되었어요.

그의 존재는 누구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절절한 마음이어서가 아니라 그와의 사랑은 이제 세상에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9시에 잠들어서 깨어버린 나의 새벽 시간. 그도 분명 , 아니 여전히 잠들지 않고 버티고 있을 시간이지만. 이 글을 그에게 공유하는 위험천만한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꾹꾹 눌러씁니다. 다짐으로, 다시 중독에 빠져들고 싶은 위험한 유혹을 느낄 때 그에게 슬쩍 건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도파민 중독. 높은 지적, 신체적, 정서적 자극을 추구하는 기질을 타고 난 사람이므로. 나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했을 뿐. 그와의 사랑은 중독적이고 치명적인 위험. 이제 마침내 그 끝에 다다랐을 뿐.


결국, 나를 이렇게 합리화시켜서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 명징한 마음으로 기어이 수 십 개월 이어온 우리의 중독적인 사랑에 매듭을 짓습니다.


몇 해 전, 그 뜨겁던 여름 한 복판에서

중독처럼 깨지 않았던 꿈은 이제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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