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5호에 점을 찍고 나서 숨을 골랐다. 순간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신중했다. 힘에 부쳐 터져 나온 한숨은 곧잘 짜증이나 불만으로 읽혔다. 나지막한 웃음은 예사로 경멸의 신호가 되었고 느슨한 걸음은 근무 태만으로 보이기 일쑤였다. 지난해 새로 온 관리소장에게 오해라고 항변해 봐야 돌아오는 대답은 빤했다.
“주민들이 그렇다면 그런 겁니다.”
뒤로 물러설 때도 뒤꿈치를 살짝 들고 천천히 내디뎠다. 요새 주민들은 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복도에서 양동이가 넘어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을 땐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점검을 위해 소화전을 열거나 택배기사가 상자를 바닥에 함부로 던져 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관리소장은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도둑이 든 아파트 단지에 사는 마음을 이해하는 것까지가 우리의 역할이라고. 어째서 매일 두 번씩 점을 찍어야 하는지 물었을 때도 같은 대답이었다.
도둑은 일 층 현관 CCTV에 잡혔다. 엘리베이터 옆 거울에는 뒷모습까지 비쳤다. 이미 폐업한 지 오래된 배달음식점 광고가 붙어 있는 거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주민이라면 대부분 핸드폰을 보거나 거울 앞을 서성이며 얼굴을 살폈다. 도둑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화면 속 도둑이 고개를 들자 얼핏 눈이 마주친 듯했다. 얼굴 형체를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마스크까지 쓴 얼굴은 짓밟힌 것처럼 뭉개져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중키에 모자를 눌러썼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낡아 빠진 CCTV는 모자 색깔조차 선명하게 보여 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선 찍히지 않았으니 계단을 이용했을 거라는 추측이 이어졌다. 피해 주민은 외부인이 침입하는 걸 왜 내버려뒀냐고 매섭게 따졌다. 딱 봐도 수상한 게 도둑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하지만 비슷한 옷차림의 주민들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거리두기가 완화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마스크를 쓴 주민들도 많았다고도 하려다 삼켰다. 대신 관리소장이 했던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주민이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관리소장은 단지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게 몹시 억울하다는 듯 경비들을 몰아붙였다. 외부인을 왜 못 알아봤냐며. 경비들은 주민의 얼굴을 일일이 외우지 못했다. 봄가을에는 매주 이사 오고 나가는 세대가 적지 않았고 시어머니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거나 아들딸이 독립하게 된 내밀한 사정까지 꿰뚫기 어려웠다. 재혼을 결정하고 살림을 합쳤거나 언제부턴가 세를 주고 따로 나가 사는 세대도 많았다. 사정을 들은 관리소장은 돌아서서 이기죽거렸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순간 남한테 피해주지 말고 집에 들어앉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거라고. 속살거리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알아듣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외부인이 확실하다는 판단에도 얼마간 머뭇댔다. 언젠가 102동 경비가 입구에서 막아섰던 여자가 303호 사모님의 친구로 밝혀진 다음부터였다. 사모님은 가뜩이나 며칠 전 경비가 자기를 아줌마라고 불러 사나워진 심정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얼굴을 붉힌 친구는 씻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고 토로했고 그 내용은 건의 사항으로 접수되었다가 경비에게 벌점제도를 운영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으로까지 이어졌다.
“대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경비는 뭘 한 거죠? 앉아서 커피나 홀짝이고 설렁설렁 산책하듯 순찰하라고 월급 주는 게 아닐 텐데요. 입이 있으면 말 좀 해 보시죠.”
피해 주민의 목소리는 점점 부풀었다. 연신 굽신대던 관리소장은 주민이 만족할 만한 대책을 열심히 강구하는 듯 보였다. 일순 관리소장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사이 합의를 본 건 쓸데없이 경찰에게 연락하지 말자는 것뿐이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단지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서 좋을 게 뭐가 있냐고.